아이가 공부 못 하는 이유
플라시보(placebo) 효과라는 게 있다. 약효가 전혀 없는 가짜약을 진짜처럼 속여 환자에게 복용시켰을 때 환자의 병세가 호전되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고통이 극심한 암환자에게, 생리식염수를 새로 개발된 탁월한 진통 주사제라고 속여 투여하면, 진통 효과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의학계의 보고도 있다. '플라시보' 란 단어는 '마음에 들도록 한다' 는 뜻을 지닌 라틴어로 가짜약을 의미한다. 즉 마음을 편안하게 해줌으로써 육체의 질병 치료에 효과를 본다는 얘기다.
환자가 약을 먹을 때에 이 약을 먹으면 반드시 나으리라는 믿음과 확신을 갖고 있으면, 비록 그 약이 가짜라고 하더라도 효과를 낸다. 이는 인간의 육체가 마음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마음의 힘이 육체의 한계을 넘어서게 한다는 동양적 사고 방식의 타당성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근대 서구적(과학적) 사고 방식은 마음의 존재를 육체(뇌세포)가 일으키는 물질적(화학적) 반응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사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 그 존재를 설명하기가 아주 난해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적 사고 방식이나 서구 근대 이전의 사고방식에서는 이 보이지 마음이 보이는 육체의 주인이라 믿었다. 따라서 아무리 훌륭한 약이라도 믿음(마음)이 없으면 효과는 격감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정화수에 약을 달이고 목욕 재개함으로써, 마음을 먼저 움직이게 한 다음 약을 먹었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과 기원이 약효에 플러스 알파가 되었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머리가 깡통인 아이가 있었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면 빵점 받아오기가 일쑤였던 아이다. 그런데 신통한 것은 이 아이가 각 방송국의 일주일간 TV 프로를 훤히 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아이를 보며 주변 사람들이 '그 머리로 구구단이나 외우지' 하고 한마디씩 했다. 그 아이가 진짜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했던 것일까.
사실 공부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는 지능이 아니라 '나는 안 돼' 라는 정서적 거부감이다. 공부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안 돼' 라는 본능적 거부감과 함께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빠져드는 아이에게는 아무리 훌륭한 선생이 아무리 쉽게 수십 번을 가르쳐도 소용이 없다. 그 아이의 마음이 이미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판에 가르침의 테크닉이 무슨 힘을 발휘하겠는가?
따라서 이런 아이에게는 무엇인가를 가르치려 하기에 앞서서 그 아이가 갖고 있는 공부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을 해소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문이 닫혀 있을 때에는 문을 여는 것이 우선 순위다. 일단은 아이에게서 '나도 할 수 있다, 그래서 하고 싶다'는 마음의 변화를 먼저 끌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너는 안 돼' 라는 사람들의 평가에 익숙한 아이의 마음은 쉽사리 '나는 할 수 있어, 하고 싶어' 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아서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에 대한 비난과 평가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시도조차 안 해보려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러면 '안 해서 그렇다' 라는 일말의 변명거리라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무너지는 자존감을 지탱할 수 있다. '공부는 안 해서 그런 것이고, 하려고 들면 (다른 일들은) 잘 할 거야' 라는 위로조차 없다면, 공부를 못한다는 것 때문에 그 외의 모든 인생에서조차 패배자로 낙인이 찍혀야 한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단지 공부 때문에 자신이 무가치하고 가망성이 없는 낙오자로 규정받아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넌 이것도 못하냐?'는 말과 눈총을 골백번 받아온 아이는, 공부로부터 도망가려는 본능이 아주 강할 수밖에 없다. 거기다 대고 아무리 얼르고 달래고 윽박질러 봐야 소용이 없다. 공부라는 말에 대하여 그 아이의 마음은 이미 강력한 방어막을 형성한 상태이기에, 절대로 어떤 내용도 학습하려 하지 않는다.
윽박지르고 달래고 몇 번이나 가르쳐도 아이의 머리는 반응하지 않는다. 아이의 마음이 거부하고 있기에 아이의 머리는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부모가 그런 내막을 모르고 있다면, 아이에 대한 감정적 평가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다른 집 애들은 그 정도 가르치면 대충 알아듣게 되는데, 어떻게 너는 그 모양이니, 전혀 뇌가 작용을 안 하는 것 같다, 정말 꼴통이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어린 아이는 부모의 인식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부모가 아이를 향해 '너는 애가 왜 그 모양이냐'는 식으로 무시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면, 아이는 자신이 바보고 멍청이라는 부모의 인식을 그대로 수용한다. 아이는 절대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해서야만 살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기에, 감히 부모의 견해에 반대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물론 나이가 좀더 들어서 청소년기에 이르면 반항과 분노로 대처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부모가 공부를 못한다고 구박하는 만큼 아이는 공부를 못하게 된다. 공부 못한다는 부모의 구박(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철저히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어쩌면 아이에 대한 구박을 통해 부모는 자신의 자존감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아이는, 부모의 자존감을 지켜 주기 위해 스스로 망가지는 쪽을 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능력은 자존감에서부터 비롯된다. 아이의 자존감은 부모의 인정에서 온다. 무언가 시도해 보려는 에너지도 부모의 인정에서 비롯된다. 아이의 실패(성적이 기대에 못 미침)에 대한 부모의 경멸과 구박은 아이에게 일종의 낙인이 되어 버린다. 더 이상 무엇을 시도해 보겠다는 에너지조차 고갈시킨다. 부모의 윽박지르기는 아이의 성적 향상보다는 부모의 열등감을 해소하는데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넌 이것도 못 하냐'라는 눈길과 암시는 아이로 하여금 점점 더 공부에서 멀어지게 한다. 따라서 부모나 교사가 취해야 할 우선적 태도는, 아이를 향한 감정적 판단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처음인 듯이 대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바로 어제 공부 했는데도 모르겠어?' 이런 말(눈길 혹은 암시)은 정말 치명적인 일격이다. 아이가 모르면 모르는 대로 인정해주고 가르치면 된다. 아이가 이해할 때까지 정말 처음 가르치는 내용인 것처럼 매번 반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의 정서적 거부감을 해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