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비용으로 쓰고 남은 돈을 넣고 나머진 할부로 프라이드 베타를 샀습니다. 내 인생은 아무리 돈을 벌어도 모을 틈이 없을만큼 가난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나는 남편에게 붙어서 또다른 인생이 시작되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가 쓰는 돈은 남편 월급에서, 내가 버는 돈은 친정으로... 아직 임대로 살다 분양받은 아파트 부금도 한참을 더 부어야했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남동생과 부모님에겐 내가 아니면 생활이 어려웠기에, 결혼 후에도 돈을 열심히 벌어야했습니다.
그러나 일년 가까이 경주까지 차몰고 출퇴근을 하던 남편이 어느 태풍이 몰아치던 아침에 고속도로에서 빗길에 미끄러져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아 뺑 도는 순간 뒤에서 오던 트럭에 또 받쳐서... 아침 10시쯤 경주 동산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시아버님과 함께 빗길에 경주로 차를 몰고 갔더니 얼굴은 퉁퉁 부어서 시퍼렀고, 쇄골뼈가 부러져 누워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뼈 하나 부러지고 살았으니 말입니다. 결혼하고 일년도 안된 임산부로 과부되지 않은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때는 남편을 살려주신 하나님이 너무 너무 고마웠습니다.
일년도 안된 새차는 그 길로 폐차되었고, 남은 할부금은 다행히 자차를 넣어두어 보험회사에서 돈이 나왔습니다. 그 돈 받아서 차 할부금을 싹 정리했습니다. 친구 말 듣고 자차 넣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동차보험이 정말로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그 사고 이후 시부모님께선 출퇴근이 위험하다고 당장 경주로 가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가 임신 9개월이라 배는 남산만했고 과외하던 아이들도 배불러오는 나를 보고는 하나씩 둘씩 빠지고 있던 터라 별 미련없이 집만 있으면 경주로 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시아버님은 2천만원을 주시면서 알아서 집을 구하라고 하셨고, 우린 경주로 집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엔 경주에 부동산중개소가 별로 없었습니다. 경주 문화는 전봇대 문화란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
모든 것은 전봇대에 다 있었습니다. 집을 구하려면 일일이 걸어다니며 전봇대보고 찾아가서 구해야했습니다. 그러나 또 그런게 생활이다보니 의외로 쉽게 구해지기도 했습니다. 2층 남향, 그런데 서쪽 벽에 붙은 집이었습니다.
친정이 주공 1층이라 겨울 난방비가 다른 집 보다 많이 들면서도 늘 추워서 1층은 절대 안하고 싶었는데 다행히 2층집이 있었어요 그런데 여름 더위도 참기 힘들었습니다. 하루에 두번씩 목욕을 시켜도 땀띠가 나는 아이, 저녁이면 뜨거운 태양에 달궈진 벽의 열기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새로 하나 장만한 티코 몰고 보문단지로 나가 아이가 잠들면 안고 들어와서 재우는 여름을 보냈습니다.
첫애를 낳고 몸조리 마치고 한달 반만에 들어간 집에서, 혼자 아이보며, 이것 저것 이유식 해먹이는 일 보통 결혼하면 누구나가 꿈꾸는 생활이었겠지만, 늘 돈을 벌던 사람이 아무것도 안하고 집에서 아이만 보고 있는게 좀 지루해지더라구요
그래서 과외 광고지 만들어서 아파트 광고판에 붙였더니 쉽게 학생이 들어오더군요 경주 문화는 전봇대 문화!! 그 문화가 정말 고맙게 여겨졌습니다. 대구에서 한 노력의 10분의 1도 안했는데도 하나 둘 학생이 모여들었어요
저녁반찬만 일찍 만들어두면, 나는 과외하고, 남편은 혼자서 저녁 차려먹고, 아이도 보고... 젖 먹일때는 한손에 아이 안고 젖먹이며 한손으론 문제풀며 설명해주고
경주라는 낯선 도시에서 남편과 아이랑 달랑 떨어져 살기 심심해서 과외를 시작한 이유도 있지만, 내 새끼는 내 손으로 가르칠거라는 늘 큰소리쳤는데, 과외안하고 몇달을 쉬니까 나 스스로 바보가 되어 가는것 같더라구요
공부는 손 놓으면 잊어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잖아요 이러다가 내 아이 학교 들어가서 내게 물으면 대답도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다시 과외를 시작해야겠다는 용기를 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젖먹이 아이가 있는 제게 많은 학생들이 오진 않았습니다. 그냥 반찬값 정도 될만큼만 벌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다니던 연구소가 문을 닫을 것같다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아야 겠다고 했습니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것이었다면 그런 걱정은 없었을텐데, 개인기업에서 운영하던 거라, 경기가 나빠지면 가장 먼저 문닫는 곳이 연구소 아닙니까?
나이 서른 넘어서 공부 할 만큼 한 사람이 갈곳이 없더라구요 공무원시험치기도 너무 나이들어 버렸고, 부지런히 원서는 냈지만 오라는 곳이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친정에는 절대로 말 못합니다. 우리 엄마 아직도 그 사실 모릅니다. 제가 입이 억수로 무겁거든요
아이 데리고 아는 사람도 없는 경주에서는 과외해서 우리 가족 먹고 살기도 힘들었습니다. "당신이 취직 안되면 나라도 해야지. 당신이 애봐. 내가 돈 벌어올께" 큰소리 치고 학원에 면접보러 갔습니다. 과외경력 내세워 학원강사자리 하나 얻어서 가르치러 나갔습니다 내겐 두번째 직장이었는데, 역시 직장생활은 적성에 안맞았어요
3시에 출근해서 10시에 퇴근하는데, 그때까지 우리 딸 젖을 못떼서 젖 먹이고 나오고 두시간에 한번씩 남편이 애 데리고 학원앞에 오면 젖 먹이고... 할짓이 아니었죠. 지금은 이렇게 말할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서글펐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학원에 나간다는 사실을 엄마가 아시고는 애를 데리고 갔습니다. 대구로
돌도 채 되기 전에 나와 딸은 주말에만 만나는..주말모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대구로 못올라간 이유는 우리 친정엄마는 남편이 경주서 직장 잘 다니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입이 안떨어지더라구요.
그러나 학원강사 월급은 너무 작았습니다. 학원 다녀보니까 머리속에 돈이 보이더라구요 그때 우리에겐 티코가 한대 있었습니다. 경주는 보문단지쪽을 제외하곤 정말 손바닥만하니까 본격적으로 과외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원에 과감히 사표던지고, 경주시내 다 돌아다니면서 과외 광고붙이고 다녔습니다.
경주 문화는 전봇대 문화!!! 이게 절 또 살렸습니다. 특히 아파트 밀집지역인 용강으로 거긴 학원이 별로 없어서 과외가 더 잘되었습니다.
주 5일 과외, 과외비는 학원 종합반 수준, 차량운행 얼마나 좋은 조건입니까? 벌떼같이 모여들었다는 건 거짓말이구요. 15평 아파트, 큰방, 작은방, 거실 세군데에 큰 상 하나씩 놓고, 이방 저방 날아다니며 가르쳤습니다.
하루종일 제가 가르치는 학생수는 40명 이상이었구요, 고3까지 마치면 12시 차태워 집에 보내주고나면 12시 30분 지나야... 그래도 수입은 남편이 받던 월급의 세배이상이었고, 애 키워주는 울 엄마에게 용돈 더 넉넉히 드릴만큼 되었습니다.
오전에는 피얼스 만나서 놀기도하고, 영어회화도 하러 다니고, 주말마다 대구가서 아이랑 놀고, 비록 남편은 직장도 없었지만, 이년 남짓한 그 생활이 내겐 천국이었습니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죠. 그러면서 여동생 시집 보낼 돈 만들어 시집도 보냈고, 전세금도 천만원이나 올려주었고... 전세금 올려주는 만큼이 우리에겐 불어난 재산이었죠.
그러던 차에 시아버지께서 직장없는 아들이 안되보이셨는지 대구에 자리를 하나 마련하셨어요 당장 또 올라오라고 하시더라구요. 어쩝니까? 올라가야죠. 시어머니는 남편이 태어나기 전부터 당뇨를 앓고 계셔서 일년에 한두번씩은 꼭 병원에 입원하시고, 시아버지마저 중풍이 오셔서 우리가 가까이 가야만 했어요
아까웠지만, 친하게 지낸 사람에게 과외 다 넘기고, 대구에 22평 아파트 전세얻어 이사왔습니다.
과외하면서 돈 부족한줄 모르고 쓰다가 또다시 월급받아 사는 생활을 하려니 갑갑하더라구요 수입이 갑자기 3분의 1로 줄고, 친정에 주고 싶어도 줄 돈도 없고.... 비록 결혼해서 친정으로 돈 많이 주긴 했지만,절대로 남편월급에선 안줬습니다. 그게 남편에 대한 예의같다고 생각했는데...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 알지만, 전 이상하게 그렇게 되더라구요
내가 벌면 버는 것에선 친정에 줘도 덜 미안한데 말입니다.
아침 6시 30분이면 출근하는 남편, 네살짜리 딸아이 유치원도 보내야하는데, 1월에 태어나 학교도 일찍 가는데, 유치원 2년은 보내야 할 것 같고, 다섯살 여섯살 이년 보내려면, 그리고 남동생 학교 졸업할때까지 학비도 마저 대주고 싶은데, 남편 월급받아서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또다시 전봇대에 과외 광고 붙이러 다녔습니다.
대구서 처음 과외시작할때랑, 경주가서 할때랑 또 다르더라구요 다시 대구로 왔을때는 이미 대구에는 넘쳐나는 대학생들이 거진 자리를 잡고 있었고, 과외비도 많이 내렸고, 경주만큼 잘 안되었어요
10월이라 날도 제법 쌀쌀해져서 네살 난 딸아이 업고 전봇대마다 과외 광고 붙이며 낮에 돌아다녔습니다. 그게 힘들어 어떤때는 퇴근해온 남편더러 차 몰아달라고 하고 붙이러 다녔습니다. 하나씩 전화문의도 오고 아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10년가까이 과외만 했는데, 실력이 늘면 늘지 줄기야 하겠습니까?
성적도 오르고 소개도 많이 나오고 또 자리 잡았습니다. 지금은 어딜 가도 먹고 살수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붙었죠. 과외 그거 제게는 끊을 수 없는 마약같은 것이었습니다. 생활이 안정이 되니까 아이가 가지고 싶더라구요
그러던차에 둘째가 생기고 배는 불러 오는데 IMF 가 터지고, 남편이 다니던 회사도 넘어가서 또 다시 실직자가 되었습니다.
아이도 이젠 둘이나 되는데... 그래서 시작한 것이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한 조그만 사업이었고, 지금은 손익분기점 넘어서고 대출금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저축이요? 아직 대출한 돈 갚느라 꿈도 못꿉니다. 그러나 지금 사업체 정리하고 대출금 다 갚는다고 하면 2억 조금 넘는 재산이 되니까 비록 빚더미 위에 있지만, 번거죠 남들은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할 동안 우린 사업에 투자했으니까요
그게 가장 나은 재테크라 생각했기에 지금도 열심히 일하며 사는 겁니다.
앞으로는 제목을 바꾸어 쓸까합니다.
쓰고 싶은 글들은, 필리핀 여행기, 시집살이얘기, 제가 애 키운 얘기, 제 아이 교육법, 그리고 과외얘기, 대치동 엄마들과는 또 다른 얘기들을 풀어놓고 싶어요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들로...
과외를 하려는 학생들, 시키시려는 부모님들, 그리고 과외로 돈을 벌고 싶어하시는 분들에게 제가 경험한 범위내에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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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가 하는 일은 그냥 조그만 사업이라고만 말하고 싶어요. 이 게시판을 통해 선전하고 싶은 맘도 없고 돈 벌고 싶은 맘도 없거든요.
내일 또 뵙겠습니다. 늘 두서없는 글이지만 오늘은 더 그럴것 같아요 긴 세월을 한꺼번에 대충 적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앞으론 한가지 주제를 정해서 쓰도록 할께요.
좋은 밤 달콤한 꿈 꾸시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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