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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살이 2탄

생각제곱 2005. 5. 27. 00:42

오랜 당뇨를 앓으시던 시어머니,
저희들은 종합병원이라고 별명을 지어드렸죠.
이 세상에 나오는 온갖 종류의 병들은 다 앓으시고, 때로는 병명도 없는 병을 앓으시기도 하셨죠.

디스크, 대상포진, 다리, 척추, 수시로 골절되시고,
저혈당으로 119 신세도 자주 지셨죠

119만큼 고마운 분들이 없었답니다. 너무 자주 애용했는데도 한번도 얼굴 찌푸리거나, 돈 달란 소리도 안하시고...
저같은 사람은 세금 많이 내야할겁니다.
119 대원들은 음료수 한박스 사드리는 것조차도 거절하시더라구요

경주에 살면서 시어머니 입원 하시면, 일 마치고 과외 마치고 저녁에 대구로 가서 남편은 병원에서 자고, 저는 시댁에서 자고, 아침에 시아버지와 교대하고 우린 또 경주로 출근을 하고...

그 당시엔 간병인이 있다는 것도 모랐고, 그저 병원 입원하시면 당연히 간병은 남편과 자식 몫이니, 시아버지와 교대로 지킬 수 밖에요

 

제가 자랄때는 병원 가는게 뭔지도 모르고, 감기 걸리면 약국에서 약 사먹고 말았는데,결혼하고 나니 응급실 수시로 들락거리고, 입원도 일년에 한달 정도 하시다가 나중엔 일년에도 몇번씩 하시니, 병원 생활이 뭔지 알겠더라구요

 

절대 쉽지 않은 일...제 시집살이는 주말에만 들락날락 거리는 시집살이 보다는 간병쪽이 더 힘들었어요

 

후회를 했죠

말이 씨가 된다는 말, 정말 저도 그 말 절실히 느끼면서....

 

저희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몇달 전부터 변을 못가리셨어요.

하루에도 몇번씩 기저귀 빨래를 해댔죠

요즘은 정말 세상이 너무 좋아져서 성인용 기저귀가 나오잖아요?

예전엔 그것이 있었는지도 몰랐죠

가난했으니 있었다 한들 살 형편도 안되었을겁니다.

 

외며느리 우리 어머니 비록 몇달 안되었지만, 그 기저귀 빨아대시며 할머니 간병하셨어요

제가 너무 사랑한 할머니 였기에, 엄마가 장사하고 늦게 들어오시는 저녁엔 제가 대신 갈아드리고 화장실 가지고 가서 빨았죠

 

그 사랑이 너무 커서...할머니를 향한 사랑이 너무 커서 한번도 더럽단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울 엄마 입장을 생각해보면, 며느리가 시어머니 응가 기저귀 빨아대는 건 좀...

그러나 울 엄마도 불평 한번 안하시고 지극정성으로 모셨거든요

 

그래서 그 때 생각했죠

"나도 시집가면 우리 시어머니 똥기저귀 빨아줘야지. 울 엄마처럼..."

 

근데 막상 닥치니까, 더구나 울 시어머니에겐 하도 날카로운 말의 칼들을 많이 맞아서, 우리 엄마가 할머니를 대하듯이, 그렇게 엄마처럼 대해지지 않더라구요

힘들었어요

 

병원에 입원 하시면, 대소변 받아내는 일 당연한건데도, 그게 저는 참 힘들었어요

소변은 화장실 가서 비우고 씻어오면 되는데, 대변은 누운 분 닦아 드리고 변기도  씻어야하니 ...

 

그러면서 전 솔직히 후회했습니다.

"왜 그때 시어머니 응가 받아줄거라고 했지? 그 말 하지 말껄..."

 

시아버지의 그늘이 제겐 참으로 큰 힘이었어요, 하루의 반을 시아버지께서 간병하셨는데, 때로는 거의 종일 시아버지께서 간병하셨는데,  남편은 아들인지라, 응가는 꼭 며느리 앞에서 하셔야 편하셨나봐요.

 

그래도 주님께서 제 기도 들어주신 것도 있어요

시어머니는 그래도 여자니까 힘들어도 받아줄 수 있는데, 만약 시아버지께 그런 상황이 오면...

몇번 상상하다 절대 안돼 고개 절래절래...

 

그러나 그런 제 마음을 들어셨는지, 하나님께선 저희 시아버지는 조용히 심장마비로 불러가셨어요.

고통없이...

돌아가시고 제일 많이 울었던게 저였을겁니다.

작은 시누이가 저더러 묻더군요

"그렇게 울고도 눈물이 또 나나? 어지간히 사랑했나보구나. 아버지가 왜 그렇게 좋았는데? "

 

퉁명스러운 말투지만, 전 작은 시누이 참 좋아했어요. 참 많은 빚을 졌지만, 하나도 못갚았어요.

언젠가 갚을 날이 오겠죠?

 

시아버님 돌아가시기 몇달 전에 시어머니와 아주 크게 부딪힌적이 있어요

일주일가량 시댁에 안갔더니 시아버지께서 오셨더군요

왜 안오느냐고

 

시아버지 앞에서 십년동안 받은 상처들 다 토해냈습니다.

"혼수 적게 해 온것부터 모든 일마다 형님과 비교하셔서 전 앞으로 어머니 안보고 살랍니다."

 

정말 용감했죠? 십년 사니까 눈에 뵈는게 없더라구요. 결혼하고 시집살이 십년에, 아들 딸 다 낳았는데, 더이상 혼수땜에 욕먹기 싫다는 오기가 생겼나봐요.

그 길로 시아버지 손에 끌려가 시어머니랑 대화를 나누는 자리까지.,...

 

거기서 저희어머니 그러시더라구요

"너거 형님은 잘못했다고 내 침대위에 올라와 손이야 발이야 싹싹 비는데, 니는 내한테 잘못 했다고 한번 해봤나?"

사실 전 사람들한테 잘못했단 말 못합니다.

아니 그런 말 할만한 잘못을 안저지르죠

전 한번도 시어머니에게 잘못한적이 없었으니까요

 

전 그 말이 너무 하기 싫어서 잘못을 안저지르는 건지도 몰라요

자존심 강하고 콧대 쎄고...

 

시어머니는 제게 불만이 있으셨겠지만, 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기에, 그 자리에서도 잘못했단 말 안했죠

아직도 전 그게 의문입니다.

왜 제게 그 말을 듣고 싶으셨는지???

 

그 이후로 시댁에 또 매일 드나들었지만, 예전같지 않았죠

이미 시어머니와 저 사이엔 엄청난 거리가 생겨버렸거든요.

 

그러던 어느날 서울에서 큰 시누네 부부가 와서 함께 동보성에 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 시부모님 댁으로 시누네 가족은 같이 가고 저희는 집으로 와서 아이 씻기고 걸레 빠는데 다급한 목소리로 큰 시누의 전화가 걸려왔어요

 

"아버지가 이상하다 빨리 온나"

같은 아파트 옆동에 살았기에 바로 둘째 업고 달려갔어요

의식이 없으시더군요

 

119 불러서 가까운 보훈 병원에 갔는데, 심장 맛사지만 하고는 더 큰 병원으로 가라 하면서 앰블런스를 불러주더군요

카톨릭 병원 으로 갔는데 응급실 도착하자마자 돌아가셨다는 판정만...

결국 다시 보훈병원으로 돌아와 장례식장으로...

 

이 모든 과정 다 지켜본 우리 아들, 한동안 기억하며 할아버지는 하늘 나라 가셨다고 하더니 지금은 잊혀졌나봅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분과 두번째 사별을 경험하고, 저는 더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만 남았어요.

참 안되었더군요

안아드리고, 제가 앞으로 잘 해 드리겠다고 위로해드렸어요

 

의지할데가 없으신 분이잖아요?

근데, 함께 모시고 살 용기는 여전히 안나더군요

 

형이 제안을 했어요

시어머니댁에 들어가 살라고, 그래서 모시라고

그러면 그 집을 우리 명의로 해 주겠노라고

 

제가 싫다고 했습니다.

집 없어도 되니까 어머니랑 한집에서는 못산다고

십년 모셨으니 미국으로 모시고 가서 이제 나머지 모시라고

 

그러나 결국 그냥 가버리더군요

시어머니 그냥 두고

왔다 갔다 하면서 너희가 모셔라는 뜻이었겠죠?

 

그러나 시어머니도 저희랑 같이 살기 싫다고 하셨답니다.

아마 시어머니께서 그렇게 하자고 했으면 저희는 강제로 들어가 살아야했겠죠?

 

혼자 계실때도 여전히 골절도 잘되고 수시로 저혈당 오시고

하루에도 몇번씩 전화해보고 전화 안받으시면 달려가고

 

때로는 가스불 켜두고 냄비 다 태우고, 가스렌지 앞에 쓰러져 계시기도 하셨고

(조금만 늦었으면 불 났을 상황이었어요. 참 아슬아슬했죠. 그 길로 불끄고 바로 119 불러 응급실로 모시고 가서 살아나시면 또 모시고 오고...)

 

19층 아파트여서, 솔직히 전화 안받으시는 시어머니댁에 갈려면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저는 무서워서 덜덜 떨었어요

그 엘리베이터 타고 시아버지 내려오셔서 돌아가셨잖아요?

그 기억도 너무나 생생한데... 저혈당으로 입에 거품물고 의식없이 몸이 뻣뻣해지신 시어머니, 설탕물 태워 입에 넣어드리고, 그래도 안되면 119 부르고

 

제겐 너무 힘든 일이었어요

나중엔 그냥 같이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혈당으로 쓰러지면서 골절도 잘 되시니까 그렇게 골절이 되시면 또 한달은 병원에 꼼짝도 않고 누워서 대소변 다 받아내야죠.

 

수시로 그런 일이 생기다가 또 골절로 입원해계시던 어느날

또 한번 시어머니와 부딪혔습니다.

 

골반뼈가 부러져서 깁스도 못하고 한달을 그냥 누워만 지내면 되는 그런 골절이었어요

대소변 받아내려면, 그리고 병원서 나오는 세끼 식사

아침 7시, 낮 12시, 오후 5시 밥시간 맞춰 식판 들어다 드리고 이 닦아드리고, 수시로 대소변 보시고

 

과외도 해야하고, 남편은 새로 시작한 사업땜에 저희는 낮에 시간이 안났어요

더구나 12시 넘어까지 과외하고, 새벽 7시에 일어나 시어머니 진지드시는 시간 맞춰 병원 갈 자신도 없는데, 시아버지도 안계시고...

 

최선이 간병인 쓰는 것이었어요

시어머니 앞으로 연금이 100만원 전후로 나왔거든요

가끔씩 병원가실때 간병인 써도 그 연금으로 혼자서 충분히 사실 수 있으셨어요

 

그 돈 모았다가 자식들 줘야되는 형편도 아니었으니까요

 

전 12시간 간병인을 쓰자고 하고 어머니는 그 돈이 아까우니까 옆의 환자에게 식판 가져다 달라고부탁하면 된다고 하고

전 그렇게 신세지기 싫고 또 자식 며느리 있는데, 병원 안붙어 있고 옆의 환자 시키는 것도 미안해서,

간병인 쓰자고 했는데, 그때 울 시어머니 또 날카로운 말 날리시더라구요

 

"조게 또 조칸다. 지 돈 아니라고 맘대로 쓸라카네"

 

그 말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더라구요. 제가 시간맞춰 병원 왔다 갔다 하려면 버스 타고 내려서 또 한코스 정도 걸어야 하는데, 하루 두번씩은 왔다 갔다 해야하는데, 제가 고생하는건 돈이 아니고, 옆에 환자 시키고, 통닭 한번쯤 시켜주면 되는걸, 뭣때문에 하루 삼만원씩 주면서 간병인 쓰느냐는 어머니 생각에 저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더라구요

 

"어머니 발로 걸어서 퇴원하세요 그럼.."

그 길로 병원 나와서 작은 시누이에게 전화했었어요

어머니가 그러신다고...

 

그때 작은 시누이 "울 엄마 원래 그렇다. 니가 가지말고 애비 보내라"

그 길로 남편에게 모든걸 맡겼습니다. 그 길로 시어머니와 또 발길을 끊었죠

아들이니까 어머니 더 잘 모시겠지. 내가 그만큼 해줬는데 뭐...

 

큰 시누이는 반응이 다르더군요

"어머니 나름대로 잘 하고 계신데, 그냥 원하는대로 해 드려라"

 

그 말 듣고 나니 더 가기 싫더군요

 

그러다가 또 퇴원하셨어요. 그러나 여전히 불편하시니 밥을 못하시죠

아침 점심 저녁 밥해서 남편 손에 쥐어 보냅니다.

가져다 드리라고

 

밥은 해 드리는데, 얼굴은 못보겠다고..

 

미국서 형이 전화가 오더군요 제 폰으로

잘 해 드리라고

 

속으로는 "니가 모셔가라" 는 말이 나왔지만, 말은 조금 더 부드럽게

"굶겨서 돌아가시게는 안할테니 염려마세요"

 

그 말에 열받았는지 동생에게 전화해서 십원짜리 욕을 했더군요

제게 꼭 전하라고 하면서

그리고 나서 확인전화까지 한번 더

제게 십원짜리 욕 전했냐먼서...

 

전 아직도 형이라는 사람이랑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결혼하고 십년도 넘게 모신 제수씨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지

제가 그랬죠

한국 들어오기만 하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해버릴거라고

 

그 이후로 저 무서워서 전화 한번 못하더군요

죽을때까지 안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가끔씩 "동서 잘 지내? "라면서 형님은 전화오지만, 아직도 전 시큰둥하게 받습니다.

 

그 일로 아주 오랫동안 시어머니 안보다가 어느날, 시어머니께 중풍이 왔어요

입이 마비가 되어 말을 못하시게되었어요

"내게 그렇게 칼 날리시더니 결국 말문을 닫으셨구나. 앞으론 내 가슴에 비수는 안꽂으시겠지?"

그런 생각이 드니 갑자기 불쌍해지더구요

 

그래서 병원갔습니다.

저보더니 말씀은 못하시고 안고는 펑펑 우시더군요

저도 안고 울었죠

 

그렇게 시어머니와는 풀렸지만, 아직도 형과는 말 안합니다.

제게 십원짜리 욕한것 사과안하는 이상...

 

병원 생활이 집에 있는 생활보다 길어지자 그 집 처분하고 시어머니는 저희 집으로...

지금도 병원에 계십니다.

이젠 치매까지 오셔서 응가 가지고 주무르고 노십니다.

아마 지금이 어머니껜 더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