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가이드 (5탄 분황사)
분황사 탑(국보 30호)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A.D.634년)에 건조되었다.
이 사찰에는 36700근에 이르는 약사여래상과 신비의 화가로 이름난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의 벽화, 호국의 용이 잠겨 있다는 우물, 그리고 유명한 석전탑등이 있다.
국보 30호로 지정된 이 탑은 안산암을 벽돌 크기로 다듬어서 쌓아올린 것이므로 석 전탑이라고 한다.
현재는 3층이지만, 본래는 9층탑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는데, 그 전체의 균형과 3층까지의 체감율 등으로 보아서는 9층탑으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1915년 이 탑이 개수되었을때 탑의 2층과 3층 사이에서 돌 상자가 발견되었다.
그 속에는 사리장치와 금으로 된 바늘, 가위, 옥으로 된 장식품 등 여인의 용품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선덕여왕의 유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특히 이 분황사는 원효 대사가 죽자 그 아들 설총이 그의 아버지 원효의 유해를 화장하여 부셔서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예불을 올렸다고 전한다.
이 소상은 고려 후기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분황사는 원효가 오랫동안 머물며 신라의 독창적 불교인 해동종을 완성한 곳이므로 해동종을 분황종이라고도 하였다.
이 절은 평지에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절터의 발굴 조사가 되지 않아 확실한 가람 배치는어렵다.
절 입구 담장 바깥 남쪽에는 커다란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데 그것으로 미루어 보면 황룡사 후면까지 연결되어 있었던 듯하다.
탑신, 인왕상, 사자상
이 돌로 된 전탑의 특색은 중앙에 감실이 마련되어 있는 점이다.
또한 돌문을 달았으며, 감실 양쪽에는 인왕상을 조각하여 놓았다.
이는 감실을 지키는 호법신으로서 수문장 역할을 하는 것이다.
조각이 아름답고 양각의 입체감이 살아있음을 물론 삼국시대 조각의 기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을 끈다.
또한 기단 네 모퉁이에는 석사자가 배치되어 있다.
이 석사자는 내륙쪽으로 고개를 향하고 있다.
이 분황사 경내에는 그 뿐만 아니로 당시의 사찰의 규모를 말하여 주는 석재들이 한쪽 담 옆에 집적되어 있으며 특히 통일시대에 사용되었던 석조가 남아있는것으로 보아 지금과 같이 작은 규모는 아니었던 듯하다.
전설
탑의 바로 옆에는 "삼룡변어정"이라는 그 당시의 우물이 있다.
석재로 된 팔각으로 본을 뜬 모양은 불가에서 말하는 8정도를 나타내고 있고 내부의 원형은 원불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이 우물에는 세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다. 신라 38대 원성왕 11년 당나라에서 사자가 이 분황사의 용을 세 마리의 고기로 변화시켜서 가지고 갔다.
왕은 이 사실을 알고 사자를 시켜 뒤쫓아 그 용을 빼앗아서는 이 우물에 다시 살게끔 넣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이 우물은 "삼룡변어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분황사 탑 앞의 사자상
이 탑 앞에는 돌로 다듬어진 사자상과 해태상이 조각되어 있다.
네 모서리에 각각 놓여있는 이 석상 가운데 사자상은 내륙쪽을 보고 있으며 해태상은 그 반대쪽을 향하고 있다.
각각 그 방향에 따라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