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게으른 자의 스승

생각제곱 2006. 1. 31. 22:38

학창시절

지독히도 가난하여, 자습서도 헌책방에서 하나 구하면 다행이고,

문제집이라고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고3이 되었다.

 

고3이 되니 학교에서 사라는 문제집도 좀 있어서 그나마 문제집이 뭔지도 알게되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공부하던 시절,

그래도 울 엄마는 내게 한번도 설거지를 시키지 않으셨다.

 

설거지 할 시간에 공부하라고...

 

죽어라고 교과서만 보면 공부 끝인줄 알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마신 물컵 정도는 씻어두라고 시키셨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게으른 자 되지 않았을텐데 싶기도 하다.

 

저녁에 우유 한잔 마신 컵을 씻으며

내게 물컵 씻기를 가르쳐준 인애가 생각이 났다.

 

십년쯤 되었나보다.

내가 과외하던 학생이었는데..

 

그때는 과외가 너무 잘 되어서

우리집 현관에 신발을 벗어둘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한때 이름을 날리던 때가 있었다.

 

소문에 소문을 물고

경주 시내를 휩쓸다 시피해서

 

때론 같은 타임에 열다섯명도 가르쳤다.

 

학년도 학교도 각각인 학생들

 

방 두개와 거실에 커다란 상 펴두고

이방 저방 날아다니며 가르쳐도

성적은 쑥쑥 잘도 올라갔고

 

그 덕에 비좁아 터진 집에 서로 들어오겠다고 줄서던 시절

 

"선생님 물 주세요" 그러면

"응 냉장고에 있으니 알아서 꺼내 마셔" 그러곤 열심히 한 학생씩 붙들고

수학도 풀고, 영어도 설명하고...

 

한바탕 아이들이 지나가고 나면

온 집안에 있는 컵이란 컵은 죄다 씽크대에 누워있고

 

물마실 컵이 없을 즈음엔

꼭 한 두 녀석이 씻어두곤 했다.

 

그때 인애는 늘 강조했었다.

"울 엄마는 물 마신 컵은 꼭 씻어두라고 하셔서

우리 집엔 물컵이 이렇게 씽크대에 쌓여있지 않아요

선생님도 물 마시면 손 잠깐만 가면 되니까

꼭 씻어서 엎어두세요" 라고...

 

늘 한귀로 흘리던 그 말이

오늘 문득 생각이 난다.

 

그 귀여운 녀석과 함께 말이다.

 

늘 그렇게 성실하던 아이

한번도 복습을 미루지 않고 공부하던 아이

 

제가 마신 물컵 씻어둘줄 아는 그 부지런함이

공부에도 그래도 남아있었는지

 

시험때 남들처럼 그렇게 허둥거리며 벼락치기 하지 않아도

늘 여유있게 준비하던 아이

 

지금쯤은 아마 결혼했겠지?

 

요즘도 물마신 컵을 씽크대로 가지고 갈때면

그 아이의 목소리가 내 귀를 맴돈다.

 

"선생님 물 마신 컵은 씻어서 엎어놓으세요. 그냥 씽크대에 던져두지 마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