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때부터 엄마가 하는 장사 도와주는게 나에겐 가장 큰 아르바이트(무보수)였다.
깨소금 장사부터 시작해서 참 많은 것을 해봤다.
떡볶이 장사도 했고, 옷장사도 했고...
대학 1학년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살고싶지 않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아마도 한달 가까이 울면서 지냈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엄마에게 권리금 받고 옷가게를 넘겼던 그 옷가게 주인이 그 상가를 팔아버린 것이다.
일년이 채 되지 않았을때였다.
새로 들어온 주인은 당장 가게를 비우고 나가라고 했다.
결국 천만원이란 권리금은 공중으로 날라가버리고, 옷보따리들만 싸안고 나와야했다.
집 가까운 시장에 가게 하나 얻어 들어갔지만, 거긴 유동인구가 너무 너무 적어서 (다 죽어가는 시장이었다.) 있던 재고 떨이하는 정도로 하곤 그냥 나와버렸다.
남은 옷들, 양말, 스타킹 등등...
게다가 보통 물건들은 외상으로 가져오지만 반품이 되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 이젠 집으로 채권자들이 들이닥친다.
물건 대 준 사람들이 빨리 돈 내라고 하며 밤이 되어도 나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하룻밤 자고 간 사람들도 있다.
최악의 채권자는 울 이모였다.
나 대학 입학할때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보증 못서준다고 했던 그 이모
엄마 장사 시작할때 빌려준 돈 받으러 와서는 단지 언니라는 이유 만으로 울 엄마 구타했다.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그러나 내겐 힘이 없었다.
빨리 돈 벌어야지
그 생각밖엔 안났다.
결국 울 이모 그 집 이사하면서 새로 사 들어간 장롱이랑 텔레비젼 들고가서 팔아 자기 돈 챙겼다.
어느 수요일 저녁
교회에 갔다 오는데, 안방에 이불이랑 옷들이 나뒹굴고 장롱이 없어졌다.
울엄마 그것 사고 좋아서 춤까지 췄었는데...
언젠가 꼭 복수하리라 마음먹었다.
빚을 빨리 갚아야 하는데...
엄마는 어떤 사람의 꼬임에 넘어가 보험을 하나 덜컥 들었다.
보험 들면 대출 된다고 해서
몇달을 넣었지만 대출은 무슨 대출
결국 매달 넣는 돈만 더 힘겹기만 했다.
내 이름으로 들어둔 보험이었다.
나 죽으면 천만원 탄다는 것 밖엔 몰랐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우리집 편해지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당시 집은 내게 행복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악몽같은 곳이었다.
늘 찾아오는 빚쟁이들...
그래서 죽고싶었다.
대학생활이 내겐 즐거운 곳이 아니었다.
돈이 없으니 남들이 엠티갈때 난 집에서 노는 것 밖엔...
죽기로 맘 먹었다.
자살
그건 절대 안한다.
자살하면 지옥간다고 교회 갈때마다 들었기때문에
난 열심히 기도했다.
하나님 나 좀 죽게 해주세요
그리고는 일주일동안 죽기를 기다렸는데 안죽었다.
그러다 생각이 바뀌었다.
난 이미 죽었다고
지금은 내가 새로운 생명을 얻어서 사는 것이니까 죽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보자
그러던 차에 울엄마 시장에서 만두를 팔기 시작했다.
가게라기 보다는 시장에서 지붕만 가리고 하는 노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준비할게 무진장 많았다.
양배추 다지고, 호박 다지고, 무 말랭이 다지고...기타등등
그 잔일들은 언제나 내차지였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울엄마 장사 미치고 들어오기 전까지 집에서 다 준비해둔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잘 시간이 없어지니까...
한 두어시간씩 그것 붙들고 씨름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칼질은 잘한다.
채썰기 다지기 뭐 그런것들
그러다 또 업종을 바꿨다.
구운 김 장사로
연탄불에 김을 구워서 파는게 일이었다.
그게 아마 벌이가 더 나았었나보다.
그것도 내겐 힘들었다.
엄마는 종일 시장에 앉아 김 구워팔 동안 나는 칠성시장 가서 김사와서 집에서 기름 바르고 소금뿌린다.
매일 천장씩...
두어시간 가량 걸렸던 것 같다. 허리도 아프고 손목도 아프고...
그때 너무 고생해서 난 첫 애 낳고 나서 손목에 뼈주사 맞았다.
그러나 그 이후론 괜찮다.
내 몸을 너무 아껴서...
그렇게 힘들게 돈 벌어서 빚값기 바쁜데, 내가 어떻게 대학원 계속 다니겠다고 고집을 하겠는가?
나는 빨리 졸업하고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솔직히 연구소란 곳
월급 무지 짠 곳이다
특히나 여자에게 있어서 월급은 남자들 받는 거의 반이다.
그 돈 벌어서 대학원 등록금 내면 딱맞다.
그러던 차에 교수님께서 포항공대 조교 자리가 났으니 거기 가서 일하면서 대학원 계속 하라고 하신다.
울 아빠에게 내가 얼마나 귀한 딸인데, 그렇게 타지에 날 혼자 내보겠는가?
기숙사는 있다고 하지만...
포항공대까지 답사 다녀오신 울 아빠
거긴 너무 외져서 절대 혼자 보낼 수 없다고 대학원 안하면 안되냐고 하셨다.
내가 생각해도 우리집 사정 뻔히 아는데
나혼자 잘되자고 거기 가겠다고 하기 너무 미안했다.
우리 부모님 내가 졸업해서 돈벌기만을 기다리셨는데,
밑으로 공부시켜야 할 동생들이 둘이나 있었고
그 어려운 형편에도 아들 하나 낳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막내 낳으셨는데
내가 잘 되는것 보다 남동생 공부시키는게 더 중요한 일이었는데...
그 마음 헤아리기에 난 기꺼이 대학원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교수님껜 죄송하지만, 휴학하겠다고
집이 너무 가난해서 더이상 공부하기가 힘들다고 사정사정해서 휴학했다.
그 이후로 난 한번도 교수님 뵈러 못갔다.
적어도 교수님께 있어서 나는 배신자였으니까...
대학원 한학기 겨우 마치고 나와서 내가 취직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과외였다.
마침 과외가 풀렸기 때문에...
학습지 교사 원서는 냈었는데, 발표가 나기 전에 과외 자리잡았던 것 같다.
엄마 장사하는 시장 사람들 자녀들부터 가르쳤다.
그리고 맨날 과외 광고지 써서 전봇대 붙이고 다니고 아파트 우편함에 넣고
그래서 아이들이 제법 많이 모였다.
집으로 불러서 하는 공부방 형태였다.
나중엔 소문이 나서 소개가 많이 들어왔다.
낮 12시부터 밤 12시까지 초등학교 1학년부터 재수생까지 거의 전과목 과외했다.
아이들이 많고, 또 우리 집으로 오기때문에 돈을 적게 받았지만, 내겐 연구소 다닐때의 수입보다 거의 서너배나 되었다.
울엄마 소원이었던 장롱도 그때 샀고, 텔레비젼에 냉장고까지 샀다.
그리고 동생들 공부도 시키고 빚도 조금씩 갚아 나가고...
과외가 나와 우리 가정을 살려주었다.
비록 떳떳한 직업도 아니었고, 저녁 시간이 더 바쁘니 친구들 만나러 나가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아이들과 씨름하고 시험때마다 스트레스에 학부모와의 면담들이 처녀인 내게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시장에서 장사하던 그 일보다는 훨씬 나았다.
수입이 좋아지자 울 엄마 장사 그만두고 전적으로 내 보조해주셨다.
점심 먹을 시간도 저녁 먹을 시간도 없었기에 끼니때마다 밥해서 먹여주는게 가장 큰 일이었다.
과외하면서 제일 화가 났던 것은 울 이모 손녀들 내게 과외시켰다.
그것도 공짜로...
참 염치도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대학 등록금 없어 보증서 달라했을때 죽어도 못한다고 해놓고
울 엄마 정말 힘들때 돈 달라고 와서 폭력까지 행사하고
내가 잘되니까 와서 자기 손녀 둘씩이나 내게 공부가르치라고
나중엔 손자까지 내게 떠 맡겼다.
도저히 용서하기 싫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라고 하셨기에 눈물을 머금고 용서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불쌍해서 잘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그 아이들 지독한 돌이었고
내가 한다고 했지만 셋 다 인문계 못가고 실업계 겨우 갔다.
결국 한녀석도 4년제 대학 못갔다.
심은대로 거둔게 아닐까???
고소해하면 안되는데, 솔직히 고소했다.
그렇게 오년을 돈벌어서 두 동생 공부시키고, 빚도 거의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임대로 살던 아파트 분양도 받았다.
이제 홀가분하게 시집가도 되겠구나...
대학 4학년때부터 연애하던 남편이랑 결혼 날 잡았다.
그러나 문제는 결혼 할 돈이 없었다.
결국 은행에서 적금대출 받아서 그돈으로 시집갔다.
그 뒷 이야기는 또 다음편에...
출처 : 짠돌이
글쓴이 : 짠순이되야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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