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때 제일 싫어하는 과목을 물으면 저는 서슴치않고, 국사와 영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해도 해도 성적이 안나오는지...
그건 제가 공부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고, 저를 이해시켜주신 선생님이 안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쓰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이고 개인적인 논리이므로, 혹자는 "니 생각이 틀렸어" 라고 생각하시거나 말씀하실 분도 계시리라 여깁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언젠가 스스로 제가 틀렸음을 깨달을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국에 살아왔고, 앞으로도 한국에 살 것이며, 가끔씩 다른 나라에 여행은 갈지 모르겠지만, 외국에 나가 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아직도 그렇습니다.
그런 제가 왜 영어공부에 그렇게 매달렸을까요?
학교 다닐때는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하기 싫었지만 억지로 했었고, 졸업하기 위해서 했었고, 과외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못하면 돈을 벌 수 없었기에, 지긋지긋한 악몽같은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길은 그 길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깊이있게 알지 못합니다. 필요한 만큼만...
그러니까 학교다닐때는 시험점수 잘 받을 만큼만 했고, 과외를 할때는 아이들을 가르칠 만큼만 했습니다.
그때문이겠죠? 저는 머리속에 든것은 없지만, 남들 보기에...특히 객관적인 점수라든가 가르치는 능력 같은 것들은 항상 좋았죠. 그래서 남들은 다 제가 공부 정말 잘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대학 교수님들을 보십시오. 좋은 대학 나오고 외국서 박사학위 받아 왔다고 다 잘 가르치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좀 이름없는 대학 나와서 그 대학에서 학위 받아도 잘 가르치는 교수님도 계시고, 비록 머리속에 든것 많아도 표현을 못하거나 가르치는 기술이 없거나 기타 등등 이유로 잘 못가르치는 분들도 계시잖아요?
전 절대등급보다 겉보기등급이 높은 사람이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절실히 아주 절실히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어느때보다 더 영어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미국인 친구가 생겼거든요.
언젠가 황신혜, 유동근 주연의 드라마가 있었어요. 애인 이었나?
그것 보면서 얼마나 부러웠던지..전 남편에게 맨날 졸랐죠. 나도 애인있으면 좋겠다..징징징...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애인하라고 한 남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희끗희끗한 머리, 파란눈에 커다란 키...남편보다 열두살이나 많은...
테니스 친구라네요.
처음 본 날 제 입은 얼어붙은 것처럼 겨우 인사만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수시로 그 남자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고, 난 올때마다 밥을 먹여주었습니다.
그러다 가까워졌죠.
그 사람과 말하기 위해서 저는 밤 3시 4시까지 한영사전 붙들고, 역사책 펴놓고 공부하고 영작하고 외웠습니다.
제가 경주에 살때였죠. 그 사람은 경주의 여러 유적지, 유물들, 역사들에 관심이 많았고, 늘 그런 것들을 물었지만, 제가 대답할 밑천이 있어야 대답을 하죠.
그래서 시간날때마다 그 사람과 유적지 한군데씩 찾아다니며, 배경이나 내려오는 설화같은 것들을 얘기해줬습니다.
한시간 가이드 하려면 전날 밤 몇시간을 책과 씨름해야 했죠.
황성공원에 있는 도서관이나 동국대 도서관 가서 역사책 찾아보고, 관광안내책자 찾아보고, 빌려와서는 집에 와서 영작하고 영작한 것 보면서 외우고...
설거지할때나 빨래 할때나 길을 걸을때나 머리 속에는 항상 생각들이 영어로 바뀌어갑니다. 내가 한 모든 생활들을 영어로 중얼거립니다.
그렇게 일년을 했습니다. 경주에 있는 유적지 안가본 곳 없이 다 가봤습니다. 또한 영어로 가이드하라면 눈감고도 할만큼 줄줄 외웠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날 갑자기 동시통역이 되더라구요
절대 어려운 것 아닌 쉬운 것..일상생활에 쓰는 말들만...
다른 한국인들과 같이 만나는 모임이 있을때 그 사람이 영어로 말하면 저는 그 자리에서 영어로 들으며 제 입으로는 한국말이 튀어나오더라구요. 한국사람이 말하면 저는 그에게 동시에 영어로 말해줬습니다.
정말 신기했어요. 저 자신도 놀랄만큼...
가끔씩 그 사람이 자기 나라 다녀온다며 한달 정도 못만날때는 영어가 너무 듣고 싶어 갈증이 났습니다.
향수병이 걸린다면 아마 그러했을겁니다. 텔레비젼? 그건 기계가 하는 소리구요...
텔레비젼에서 하는 영어 전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말이 너무 빨라서
제가 그 말을 했더니 그 사람 하는 말이 그건 당연하대요
특히 cnn아나운서들 말을 빨리 해서 알아들으려면 첨부터 끝까지 다 들으려고 하지 말고 중요한 부분만 듣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라네요.
그래도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느낀 게있죠. 언어는 서로 마음이 통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마음만 통하면 언어 자체는 아무 문제가 안된다.
그래서 한국의 많은 여자들이 외국인과 결혼하고서도 언어 소통에 지장이 없는 것이 아닐까?
그를 만나면서, 영어를 더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하지만, 돈 안들이고 공부해야죠.
그 당시에도 전 저 자신을 위해 돈쓰는 것에 무지 인색했거든요
그를 통해 펜팔친구를 소개받았습니다. 물론 미국인이었고, 여자였어요
인터넷? 이메일? 그런 용어조차 모를때였어요
편지 한번 보내고 답장 받으려면 한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한달에 한번씩 전 꼬박꼬박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그녀는 사진 찍는게 취미였고, 미국의 아름다운 자연들을 많이 찍어서 보내줬어요.
전 한국의 엽서들도 보내고, 그녀가 특히 좋아했던 단청도 절마다 찾아다니며 찍어주었죠
그녀는 전공이 미술이었거든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미술쪽으로도 공부를 하게 되더라구요. 어느 절에 단청이 이쁜지..뭐 그런 것들...
그때 처음으로 후회했습니다. 국사 공부 좀 열심히 할껄...
우리 나라를 소개하려고 해도 아는게 있어야 하죠. 국사가 필요할 때가 있구나 내가 왜 필요없는 과목이라고 투덜댔을까? 뭐 그런 후회들이죠
그 이후로 국사가 또 절실히 필요한 날들이 한번 더 왔습니다. 그 얘기도 나중에...
남자친구와 펜팔친구
제 생활의 반은 영어로, 반은 국어로...
그러던중 동국대에 갔다가 광고를 하나 봤습니다.
번역 같이 할 사람 구함. 한국 소설을 영어로 초벌 번역해 줄 분
신디
전화했더니, 한국말 유창하게 하는 미국인이었어요
계명대 대학원에서 국어를 전공하고 있으며 동국대 영어 회화 강사였어요
그러니 국어를 잘 할수밖에요.
그녀와 박경리씨의 김약국집 딸들 이란 소설번역을 했습니다. 제가 소설을 먼저 영어로 번역해가구요, 그녀는 제가 초벌번역한 영어를 자신이 이해될때까지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문학적인 표현으로 고쳤습니다.
그녀의 전공이 문학이었어요. 그리고 글을 아주 잘 썼어요.
그녀가 한국에서 국어를 공부하면서 느낀게, 외국에 번역되어 나가는 우리나라 책들의 번역이 너무나 형편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문학 작품을 정말 문학작품 답게 번역해보고 싶다면서 박경리씨를 만나 그 얘기를 했더니 흔쾌히 허락하시더라고..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꼭 해보고 싶은 일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사투리도 많고, 속담이나 뭐 그런 것들이 자신이 읽으면 충분히 이해되지 않으니까 한국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전 제 영어 공부에 무지 도움이 되어서 기꺼이 하겠다고 한거죠
보수? 없습니다. 단지 그녀는 제가 너무나 멋진 영어선생님이었죠. 영어사전같은...
영어에도 여러가지 표현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직접 느끼게 해준...
매주 두어번씩 만나서 그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전 매일 매일 책을 한두장씩 영작하는 숙제를 했어야했구요
피얼스를 처음 만났을때 말하기 위해 영작하던 것보다 어쩌면 더 고생하면서 소설번역을 했습니다.
피얼스는 영어 말문이 트이게 해 준 친구였고, 캐롤은 한달에 한번 제 영어실력 향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활들을 써서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찍은 사진과 함께 국제 우편으로 보내준 친구였으며, 신디는 하루도 빠짐없어 영어로 생각하고 영작하게 만들어준, 그리고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들을 가르쳐준 친구였어요.
세친구들이 저를 영어공부하게끔 만들어주었고, 영어라는 언어를 통해 저는 그들의 사고를 배웠습니다.
지금도 저는 언어는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과 지낸 몇년동안 제 사상도 그들처럼 바뀌었고,(어쩌면 한국인으로는 상당히 위험한 수위임) 제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끔찍한 생각도 들만큼...사고가 바뀌더라구요
아
또 한사람 더 있었네요. 제 사고에 아주 큰 영향을 준 남자가...
영어에 한번 빠지니까 다른게 재미없더라구요. 피얼스는 이년정도 한국에 머물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펜팔 친구인 캐롤은 한달에 한번 겨우 편지 한두장으로 소식을 전할 뿐이고, 신디랑 소설번역을 하긴 하지만, 영어로 수다를 떨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큰맘먹고 영어 회화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거기 가면 하루 한시간씩은 실컨 떠들다 올 수 있잖아요? 영어에 대한 목마름이었어요
경주에 대학생 이상 다닐수있는 학원이 두군데 있었어요 그중 한군데..동국대 앞에 있는 회화 학원에 프리토킹 반을 신청해 들었어요
그 반은 교재도 없이 그냥 입만 가지고 가면 됩니다. 아침 7시 타임...
저녁엔 과외를 해야 헀으니 시간이 안나고 공부를 하려면 아침반 밖엔 없어서...
아침마다 일어나 버스타고 학원 갔습니다. 그 길이 제겐 얼마나 즐거운 길이었는지 모릅니다. 영어 선생님은 마크. 미국인이지만 무늬만 미국인이었어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캐나다에서 자랐고 캐나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미국사람은 모든 생각의 중심에 우월주의를 가지고 있어요. 자기 나라 사람이 제일이라는 생각
그게 은연중에 항상 나타나죠 그래서 마크는 비록 국적인 미국인이었지만, 자기는 미국인을 싫어한다고.. 그래서 자기는 언제나 캐나다인이라고 말하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반면 캐나다인은 자유주의자고. 그건 그당시 제겐 충격적인 사고방식이었죠.
그러나 말하면서 서서히 동화되어 가는 느낌이 들더군요
어떤 일들이 있었나하면요...학기 중에는 강의를 듣는 대학생들이 많지만, 방학이 되면 반 이하로 줄어요
때론 한 타임에 세명정도...
동국대엔 유학(?)온 학생들이 많아서 그렇겠죠?
한번은 수업 듣는 멤버가 직장인 남자 하나, 영국 유학 이년 다녀온 여자 하나, 그리고 아줌마인 저, 선생인 마크
남자 둘 여자둘 짝이 잘 맞았어요.
아침 7시에 만나, 직장인 남자가 모는 차 타고 동국대 가서 아침 먹으며 한시간 떠들다 오기도 하구요,
때로는 밤에 만나 놀기도 했지요.
나는 과외 끝나고 열시(방학이라 빨리 끝난거죠. 학기중엔 늘 12시 1시를 넘겼지만), 마크도 학원 끝나는 시간에 천마공원에서 만나 간단한 음료수 한잔 마시고, 밤길을 걸어 동국대까지 와서 카페에 들어가 포켓볼 치고 (내기를 주로 하죠.) 얘기하고 그렇게 두세시까지 놀다가 집으로 들어가곤...
결혼해서 참 좋구나라고 느낀게 그당시였어요 처녀때는 우리 부모님이 정해논 통금땜에 맘껏 놀지도 못했는데, 결혼하니 자유가 생기더라구요. 밤 두세시까지 마음껏 놀아도 남편은 한번도 화 안냈거든요.
내가 즐거워하는걸로 좋아해주는 착한 남자였죠.
그 덕에 영어는 내게 너무나 자연스런 언어가 되었고, 그들의 문화와 사고가 이해가 되더라구요
그러나 만약 내 딸 아이가 나처럼 그런다면 말릴것 같아요
나는 절제하는 능력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아직 아니잖아요?
어쩌면 마크때문에, 제가 6학년이 된 우리 애 영어회화 학원에 안보내는지도 모르죠
혹 그런 사상 배울까봐서...
어릴때는 보내도 뭘 알겠습니까? 그러나 사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절대로 절 절 대로 캐나다인 사상에 물들이고 싶지 않아요. (이러다 돌맞는것 아닐까???)
제 편견이고 제 주관적인 생각이겠지만...
그 당시 마크는 동거하는 여자가 있었어요.하지만,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거하는 것일뿐 한국에서 돈 일년 벌고 떠나는 순간 헤어질거랍니다.
그런 사고가 그들의 사고였어요 성 자유주의라고 해야 하나?
적어도 스스로를 절제할 나이가 될때까지, 스스로 판단할 나이가 될때가지는 그런 사고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게 한국인 엄마로서의 제 마음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이상한대로 새는것 같아요
다시 짠돌이 카페 성격에 맞도록 돌아와서
제가 미국인 친구들에게 배운게 바로 짠돌이 정신입니다.
우린 설거지할때 수도물 틀어두고 그냥 흐르는 물에 씻는게 대부분이잖아요?
그러나 피얼스는 절대로 그렇게 설거지 안합니다.
물 조금 틀어서 씻고 다시 물 잠그고 그릇 탈탈 털어 엎어두고 또 물 조금 틀어서 그릇 하나 씻고 그릇 엎을동안 물 잠그고
그가 말하더군요
한국인은 물을 너무 펑펑 쓰는 것 같다고, 물값이 싸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고
캐롤은 편지 보낼때 자기가 찍은 사진으로 카드 만들어 보냅니다. 나중에 제가 사진 올릴께요.
처음엔 실망이었어요 참 멋진 카드가 올줄 알았는데, 도화지 잘라서 사진 한장 붙이고 거기에 편지써서...
그러나 자꾸 받다보니 그것만큼 정성이 든게 없었어요
때론 사진 뒷면이 편지지가 되기도 합니다. 이면지 활용치곤 너무 멋진 활용이죠?
신디집엔 제가 자주 드나들어서 그녀의 절약정신도 많이 배웠어요
항상 조그만 박스 하나 방 한쪽 면에 두고, 조그만 종이 조각이라도 다 거기 담습니다. 그 당시엔 쓰레기봉투나 분리수거도 없었는데, 신디는 언제나 종이는 철저히 분리수거했었어요.
손톱만한 종이조차도 절대 쓰레기통에 안넣고 종이만 모으는 박스에 넣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이런건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지 그러냐고 하니까 펄펄 뛰면서 재생해서 쓸 수 있는데 쓰레기로 버리면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들이 한국에 나와서 돈이 없어서 그러했을까요? 아니죠 절약한다는 것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을겁니다.
저는 가난해서 없어서 절약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았지만, 그들은 있어도 절약하는 교육을 받고 자랐더라구요.
그 친구들을 통해 배운게 너무 많았습니다.
아...피얼스 한 사람 얘기만으로도 밤새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도 여기서 그만 접어야겠어요
제 글 올라오기만 기다린다는 님 덕분에 잠 안자고 글 하나 올립니다.
내일 아침은 좀 바쁠 것 같아서요... 편한 밤 되십시오. 부자되는 꿈 꾸십시오.
이제 자러 가야겠어요. 내일을 위해서...
그건 제가 공부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고, 저를 이해시켜주신 선생님이 안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쓰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이고 개인적인 논리이므로, 혹자는 "니 생각이 틀렸어" 라고 생각하시거나 말씀하실 분도 계시리라 여깁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언젠가 스스로 제가 틀렸음을 깨달을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국에 살아왔고, 앞으로도 한국에 살 것이며, 가끔씩 다른 나라에 여행은 갈지 모르겠지만, 외국에 나가 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아직도 그렇습니다.
그런 제가 왜 영어공부에 그렇게 매달렸을까요?
학교 다닐때는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하기 싫었지만 억지로 했었고, 졸업하기 위해서 했었고, 과외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못하면 돈을 벌 수 없었기에, 지긋지긋한 악몽같은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길은 그 길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깊이있게 알지 못합니다. 필요한 만큼만...
그러니까 학교다닐때는 시험점수 잘 받을 만큼만 했고, 과외를 할때는 아이들을 가르칠 만큼만 했습니다.
그때문이겠죠? 저는 머리속에 든것은 없지만, 남들 보기에...특히 객관적인 점수라든가 가르치는 능력 같은 것들은 항상 좋았죠. 그래서 남들은 다 제가 공부 정말 잘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대학 교수님들을 보십시오. 좋은 대학 나오고 외국서 박사학위 받아 왔다고 다 잘 가르치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좀 이름없는 대학 나와서 그 대학에서 학위 받아도 잘 가르치는 교수님도 계시고, 비록 머리속에 든것 많아도 표현을 못하거나 가르치는 기술이 없거나 기타 등등 이유로 잘 못가르치는 분들도 계시잖아요?
전 절대등급보다 겉보기등급이 높은 사람이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절실히 아주 절실히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어느때보다 더 영어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미국인 친구가 생겼거든요.
언젠가 황신혜, 유동근 주연의 드라마가 있었어요. 애인 이었나?
그것 보면서 얼마나 부러웠던지..전 남편에게 맨날 졸랐죠. 나도 애인있으면 좋겠다..징징징...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애인하라고 한 남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희끗희끗한 머리, 파란눈에 커다란 키...남편보다 열두살이나 많은...
테니스 친구라네요.
처음 본 날 제 입은 얼어붙은 것처럼 겨우 인사만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수시로 그 남자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고, 난 올때마다 밥을 먹여주었습니다.
그러다 가까워졌죠.
그 사람과 말하기 위해서 저는 밤 3시 4시까지 한영사전 붙들고, 역사책 펴놓고 공부하고 영작하고 외웠습니다.
제가 경주에 살때였죠. 그 사람은 경주의 여러 유적지, 유물들, 역사들에 관심이 많았고, 늘 그런 것들을 물었지만, 제가 대답할 밑천이 있어야 대답을 하죠.
그래서 시간날때마다 그 사람과 유적지 한군데씩 찾아다니며, 배경이나 내려오는 설화같은 것들을 얘기해줬습니다.
한시간 가이드 하려면 전날 밤 몇시간을 책과 씨름해야 했죠.
황성공원에 있는 도서관이나 동국대 도서관 가서 역사책 찾아보고, 관광안내책자 찾아보고, 빌려와서는 집에 와서 영작하고 영작한 것 보면서 외우고...
설거지할때나 빨래 할때나 길을 걸을때나 머리 속에는 항상 생각들이 영어로 바뀌어갑니다. 내가 한 모든 생활들을 영어로 중얼거립니다.
그렇게 일년을 했습니다. 경주에 있는 유적지 안가본 곳 없이 다 가봤습니다. 또한 영어로 가이드하라면 눈감고도 할만큼 줄줄 외웠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날 갑자기 동시통역이 되더라구요
절대 어려운 것 아닌 쉬운 것..일상생활에 쓰는 말들만...
다른 한국인들과 같이 만나는 모임이 있을때 그 사람이 영어로 말하면 저는 그 자리에서 영어로 들으며 제 입으로는 한국말이 튀어나오더라구요. 한국사람이 말하면 저는 그에게 동시에 영어로 말해줬습니다.
정말 신기했어요. 저 자신도 놀랄만큼...
가끔씩 그 사람이 자기 나라 다녀온다며 한달 정도 못만날때는 영어가 너무 듣고 싶어 갈증이 났습니다.
향수병이 걸린다면 아마 그러했을겁니다. 텔레비젼? 그건 기계가 하는 소리구요...
텔레비젼에서 하는 영어 전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말이 너무 빨라서
제가 그 말을 했더니 그 사람 하는 말이 그건 당연하대요
특히 cnn아나운서들 말을 빨리 해서 알아들으려면 첨부터 끝까지 다 들으려고 하지 말고 중요한 부분만 듣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라네요.
그래도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느낀 게있죠. 언어는 서로 마음이 통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마음만 통하면 언어 자체는 아무 문제가 안된다.
그래서 한국의 많은 여자들이 외국인과 결혼하고서도 언어 소통에 지장이 없는 것이 아닐까?
그를 만나면서, 영어를 더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하지만, 돈 안들이고 공부해야죠.
그 당시에도 전 저 자신을 위해 돈쓰는 것에 무지 인색했거든요
그를 통해 펜팔친구를 소개받았습니다. 물론 미국인이었고, 여자였어요
인터넷? 이메일? 그런 용어조차 모를때였어요
편지 한번 보내고 답장 받으려면 한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한달에 한번씩 전 꼬박꼬박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그녀는 사진 찍는게 취미였고, 미국의 아름다운 자연들을 많이 찍어서 보내줬어요.
전 한국의 엽서들도 보내고, 그녀가 특히 좋아했던 단청도 절마다 찾아다니며 찍어주었죠
그녀는 전공이 미술이었거든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미술쪽으로도 공부를 하게 되더라구요. 어느 절에 단청이 이쁜지..뭐 그런 것들...
그때 처음으로 후회했습니다. 국사 공부 좀 열심히 할껄...
우리 나라를 소개하려고 해도 아는게 있어야 하죠. 국사가 필요할 때가 있구나 내가 왜 필요없는 과목이라고 투덜댔을까? 뭐 그런 후회들이죠
그 이후로 국사가 또 절실히 필요한 날들이 한번 더 왔습니다. 그 얘기도 나중에...
남자친구와 펜팔친구
제 생활의 반은 영어로, 반은 국어로...
그러던중 동국대에 갔다가 광고를 하나 봤습니다.
번역 같이 할 사람 구함. 한국 소설을 영어로 초벌 번역해 줄 분
신디
전화했더니, 한국말 유창하게 하는 미국인이었어요
계명대 대학원에서 국어를 전공하고 있으며 동국대 영어 회화 강사였어요
그러니 국어를 잘 할수밖에요.
그녀와 박경리씨의 김약국집 딸들 이란 소설번역을 했습니다. 제가 소설을 먼저 영어로 번역해가구요, 그녀는 제가 초벌번역한 영어를 자신이 이해될때까지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문학적인 표현으로 고쳤습니다.
그녀의 전공이 문학이었어요. 그리고 글을 아주 잘 썼어요.
그녀가 한국에서 국어를 공부하면서 느낀게, 외국에 번역되어 나가는 우리나라 책들의 번역이 너무나 형편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문학 작품을 정말 문학작품 답게 번역해보고 싶다면서 박경리씨를 만나 그 얘기를 했더니 흔쾌히 허락하시더라고..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꼭 해보고 싶은 일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사투리도 많고, 속담이나 뭐 그런 것들이 자신이 읽으면 충분히 이해되지 않으니까 한국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전 제 영어 공부에 무지 도움이 되어서 기꺼이 하겠다고 한거죠
보수? 없습니다. 단지 그녀는 제가 너무나 멋진 영어선생님이었죠. 영어사전같은...
영어에도 여러가지 표현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직접 느끼게 해준...
매주 두어번씩 만나서 그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전 매일 매일 책을 한두장씩 영작하는 숙제를 했어야했구요
피얼스를 처음 만났을때 말하기 위해 영작하던 것보다 어쩌면 더 고생하면서 소설번역을 했습니다.
피얼스는 영어 말문이 트이게 해 준 친구였고, 캐롤은 한달에 한번 제 영어실력 향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활들을 써서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찍은 사진과 함께 국제 우편으로 보내준 친구였으며, 신디는 하루도 빠짐없어 영어로 생각하고 영작하게 만들어준, 그리고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들을 가르쳐준 친구였어요.
세친구들이 저를 영어공부하게끔 만들어주었고, 영어라는 언어를 통해 저는 그들의 사고를 배웠습니다.
지금도 저는 언어는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과 지낸 몇년동안 제 사상도 그들처럼 바뀌었고,(어쩌면 한국인으로는 상당히 위험한 수위임) 제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끔찍한 생각도 들만큼...사고가 바뀌더라구요
아
또 한사람 더 있었네요. 제 사고에 아주 큰 영향을 준 남자가...
영어에 한번 빠지니까 다른게 재미없더라구요. 피얼스는 이년정도 한국에 머물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펜팔 친구인 캐롤은 한달에 한번 겨우 편지 한두장으로 소식을 전할 뿐이고, 신디랑 소설번역을 하긴 하지만, 영어로 수다를 떨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큰맘먹고 영어 회화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거기 가면 하루 한시간씩은 실컨 떠들다 올 수 있잖아요? 영어에 대한 목마름이었어요
경주에 대학생 이상 다닐수있는 학원이 두군데 있었어요 그중 한군데..동국대 앞에 있는 회화 학원에 프리토킹 반을 신청해 들었어요
그 반은 교재도 없이 그냥 입만 가지고 가면 됩니다. 아침 7시 타임...
저녁엔 과외를 해야 헀으니 시간이 안나고 공부를 하려면 아침반 밖엔 없어서...
아침마다 일어나 버스타고 학원 갔습니다. 그 길이 제겐 얼마나 즐거운 길이었는지 모릅니다. 영어 선생님은 마크. 미국인이지만 무늬만 미국인이었어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캐나다에서 자랐고 캐나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미국사람은 모든 생각의 중심에 우월주의를 가지고 있어요. 자기 나라 사람이 제일이라는 생각
그게 은연중에 항상 나타나죠 그래서 마크는 비록 국적인 미국인이었지만, 자기는 미국인을 싫어한다고.. 그래서 자기는 언제나 캐나다인이라고 말하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반면 캐나다인은 자유주의자고. 그건 그당시 제겐 충격적인 사고방식이었죠.
그러나 말하면서 서서히 동화되어 가는 느낌이 들더군요
어떤 일들이 있었나하면요...학기 중에는 강의를 듣는 대학생들이 많지만, 방학이 되면 반 이하로 줄어요
때론 한 타임에 세명정도...
동국대엔 유학(?)온 학생들이 많아서 그렇겠죠?
한번은 수업 듣는 멤버가 직장인 남자 하나, 영국 유학 이년 다녀온 여자 하나, 그리고 아줌마인 저, 선생인 마크
남자 둘 여자둘 짝이 잘 맞았어요.
아침 7시에 만나, 직장인 남자가 모는 차 타고 동국대 가서 아침 먹으며 한시간 떠들다 오기도 하구요,
때로는 밤에 만나 놀기도 했지요.
나는 과외 끝나고 열시(방학이라 빨리 끝난거죠. 학기중엔 늘 12시 1시를 넘겼지만), 마크도 학원 끝나는 시간에 천마공원에서 만나 간단한 음료수 한잔 마시고, 밤길을 걸어 동국대까지 와서 카페에 들어가 포켓볼 치고 (내기를 주로 하죠.) 얘기하고 그렇게 두세시까지 놀다가 집으로 들어가곤...
결혼해서 참 좋구나라고 느낀게 그당시였어요 처녀때는 우리 부모님이 정해논 통금땜에 맘껏 놀지도 못했는데, 결혼하니 자유가 생기더라구요. 밤 두세시까지 마음껏 놀아도 남편은 한번도 화 안냈거든요.
내가 즐거워하는걸로 좋아해주는 착한 남자였죠.
그 덕에 영어는 내게 너무나 자연스런 언어가 되었고, 그들의 문화와 사고가 이해가 되더라구요
그러나 만약 내 딸 아이가 나처럼 그런다면 말릴것 같아요
나는 절제하는 능력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아직 아니잖아요?
어쩌면 마크때문에, 제가 6학년이 된 우리 애 영어회화 학원에 안보내는지도 모르죠
혹 그런 사상 배울까봐서...
어릴때는 보내도 뭘 알겠습니까? 그러나 사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절대로 절 절 대로 캐나다인 사상에 물들이고 싶지 않아요. (이러다 돌맞는것 아닐까???)
제 편견이고 제 주관적인 생각이겠지만...
그 당시 마크는 동거하는 여자가 있었어요.하지만,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거하는 것일뿐 한국에서 돈 일년 벌고 떠나는 순간 헤어질거랍니다.
그런 사고가 그들의 사고였어요 성 자유주의라고 해야 하나?
적어도 스스로를 절제할 나이가 될때까지, 스스로 판단할 나이가 될때가지는 그런 사고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게 한국인 엄마로서의 제 마음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이상한대로 새는것 같아요
다시 짠돌이 카페 성격에 맞도록 돌아와서
제가 미국인 친구들에게 배운게 바로 짠돌이 정신입니다.
우린 설거지할때 수도물 틀어두고 그냥 흐르는 물에 씻는게 대부분이잖아요?
그러나 피얼스는 절대로 그렇게 설거지 안합니다.
물 조금 틀어서 씻고 다시 물 잠그고 그릇 탈탈 털어 엎어두고 또 물 조금 틀어서 그릇 하나 씻고 그릇 엎을동안 물 잠그고
그가 말하더군요
한국인은 물을 너무 펑펑 쓰는 것 같다고, 물값이 싸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고
캐롤은 편지 보낼때 자기가 찍은 사진으로 카드 만들어 보냅니다. 나중에 제가 사진 올릴께요.
처음엔 실망이었어요 참 멋진 카드가 올줄 알았는데, 도화지 잘라서 사진 한장 붙이고 거기에 편지써서...
그러나 자꾸 받다보니 그것만큼 정성이 든게 없었어요
때론 사진 뒷면이 편지지가 되기도 합니다. 이면지 활용치곤 너무 멋진 활용이죠?
신디집엔 제가 자주 드나들어서 그녀의 절약정신도 많이 배웠어요
항상 조그만 박스 하나 방 한쪽 면에 두고, 조그만 종이 조각이라도 다 거기 담습니다. 그 당시엔 쓰레기봉투나 분리수거도 없었는데, 신디는 언제나 종이는 철저히 분리수거했었어요.
손톱만한 종이조차도 절대 쓰레기통에 안넣고 종이만 모으는 박스에 넣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이런건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지 그러냐고 하니까 펄펄 뛰면서 재생해서 쓸 수 있는데 쓰레기로 버리면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들이 한국에 나와서 돈이 없어서 그러했을까요? 아니죠 절약한다는 것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을겁니다.
저는 가난해서 없어서 절약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았지만, 그들은 있어도 절약하는 교육을 받고 자랐더라구요.
그 친구들을 통해 배운게 너무 많았습니다.
아...피얼스 한 사람 얘기만으로도 밤새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도 여기서 그만 접어야겠어요
제 글 올라오기만 기다린다는 님 덕분에 잠 안자고 글 하나 올립니다.
내일 아침은 좀 바쁠 것 같아서요... 편한 밤 되십시오. 부자되는 꿈 꾸십시오.
이제 자러 가야겠어요. 내일을 위해서...
출처 : 짠돌이
글쓴이 : 짠순이되야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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