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인생 제 신혼의 첫출발을 중고로 시작하였습니다. 결혼할 남편에겐 위로 누나 둘 형 하나 딸 딸 아들 아들 집안의 막내였습니다.
형, 제게는 시아주버님이죠. 제가 결혼하기 몇달전에 미국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LG에 다니고 있었고, 거기서 미국지사로 발령이 난 것이었습니다. 가면서 집을 처분하면서, 텔레비젼과 장롱과 침대를 동생인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전 그냥 남편에게 주고 간건줄 알았는데, 한참 혼수를 준비하는 가운데, 결혼 몇주전에 남편이 제게 전화를 걸어서는 형에게 받은 장롱이랑 침대랑 텔레비젼 값으로 오십만원을 줘야 한다고 돈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참...답답했습니다. 울 부모님께 말도 못하고 그냥 줘버렸습니다. 그러나 결혼전에 그 일로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신혼인데, 결혼하려고 대출 받은 돈으로 장롱이랑 침대 정도는 사갈 수 있었는데, 그것도 못사게 하더니, 나중에 분가할때 사서 나가자고 하면서 그냥 형꺼 받아쓰자 하더니, 결혼 직전이 되자 그값으로 돈을 달라고 하다니...
솔직히 중고 사서 신혼 시작하고 싶은 사람 몇이나 있겠는가? 완전히 어거지로 중고가구로 신혼을 시작했습니다. 공짜였더라면 아마 덜 억울했을듯...
그 장롱 이사도 자주 다녔습니다. 시아주버님이 주인이었을 때 두번 이사, 다시 남편에게 오면서 한번 이사, 우리가 경주로 분가하며 또 한번, 대구로 다시 올때 이사.이렇게 하여 다섯번째 이사하던 장롱이 드디어 맛이 가고 있었습니다. 이사해주던 이삿짐 센터 총각이, "담에 이사할때는 농좀 버리고 가세요. 다음엔 옮기기도 힘들겠어요. 제가 여기 이 부분 잘 못박아뒀으니, 담엔 꼭 새농 사서 이사하세요"
그랬던 농이었는데, 이사후 석달만에 또 이사할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그 이삿짐센터 불렀더니 그 총각이 또 왔습니다. "이 농 안버리고 또 가지고 가시려구요? 아직 하나 살 형편 안되세요?" 라며 놀립니다. 그때가 IMF 오기 직전이라, 그 당시만 해도 포장 이사값도 거의 백만원대였기 때문에, 저는 슈퍼마켓 가서 박스 얻어다 짐 하나 하나 다 꾸려서 일주일 이상 이사준비를 했습니다.
저라고 왜 장롱을 사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더군다나 첨부터 그 장롱 보기 싫었는데... 진짜 다 부숴져서 새로 사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농 하나 살 여유가 안되었던 터라 이삿짐 총각에게 잘 부탁했습니다. 그때가지 돈도 무지 많이 벌었지만, 나갈 곳도 무지 많았었어요. 여동생 시집 보냈고, 우리 전세도 천만원이나 올려주었구요, 제가 결혼할때 대출해간 돈도 갚았구요...그러다보니 농 살돈이 안생기더라구요. 무리해서 샀더라면 살 수도 있었겠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어쩝니까? 이삿짐 옮겨주는 총각한테 웃으면서 말했죠. "어디 부서졌는지 잘 아시니까 조심해서 잘 옮겨주세요." 그 총각 내가 안쓰러워보였는지, 옮겨놓고 나서 이번엔 더 꼼꼼히 못질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다음번엔 꼭 버리세요. 한번 더 이사하면 다 부숴질겁니다 아마..."
결혼 5년동안 네번 이사했습니다. 할때마다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갔지만, 짐은 늘 그대로였습니다. 그 넓은 집들이 다 내집이 아니라 늘 전세였으니까요... 내 집 사면 꼭 새 물건 장만하리라 그렇게 생각했기에 다 부숴져가는 장롱이었지만, 옮겨보고 부서지기 전까진 끌고 다녀야했습니다.
난 한번도 집에 커튼을 산 적이 없었습니다. 단적도 없었구요, 그냥 커튼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신혼집이었지만, 우리 집은 마치 결혼 이삼십년 하고 살았던 사람 집마냥 그랬었어요.
처음 경주로 분가할때 주공아파트 15평에 전세 2000주고 들어갔습니다. 주인이 도배 장판 해주어야 하는데, 아직 깨끗하고 쓸만한데 그냥 살라고 하면서 안해줬어요. 장판은 골이 패여있어서 때가 끼이면 잘 지지도 않고, 아무리 열심히 닦아도 늘 거무틱틱했습니다. 원래 깔끔하게 청소하고 사는 편이 아니라, 더 지저분해보였을지도 모르죠.
지금도 나는 청소는 잘 못합니다. 그리고 다림질도 못합니다. 내가 못하는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빨래도 못하고, 정리도 못하고, 목욕할때 때도 잘 못밀고, 인테리어는 아예 내 머리속에 없는 단어였습니다.
다만 요리는 좀 합니다. 잘 하는게 아니라 요리는 실험하듯이 하면 되니까 그중 젤 쉬웠습니다. 그리고 설거지도 잘합니다. 대학 다닐때 실험도구들 하도 많이 씻어서...
결혼할때 주택에 사시던 우리 시부모님 아파트 사서 이사하셨습니다. 새 집에서 집들이겸 시아버님 생신잔치를 한다며 저더러 요리를 하라고 하셨어요. 친척들 불러서 잔치할거라고
큰 며느리는 미국에 있고 두 시누는 서울 사니 당연히 젤 가까운 경주 사는 제가 준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번도 안해본 일이었지만, 겁없이 덤비는 일 정말 잘하는 나는 또 그게 며느리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 생각했기에 한다고 큰소리치고는 토요일 일찍 대구 올라가서 장보고 음식 만들어 저녁 대접을 했습니다.
요리책 두권보고, 할만한 음식 뽑아서 목록 만들고 장보고 책보면서 만들었습니다. 시어머니께서 제 조수역할 잘 해 주셨지요. 일단 눈에 보기 예쁘게 하면 될 것 같아서 알록달록 예쁜 것들만, 만들어 올렸습니다. 내가 차려놓고 봐도 참 예뻤어요. 맛이야, 요리책 적힌대로 하면 비슷한 맛 나니까 다들 맛있다며 잘 드시고, 며느리 잘 봤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때 기분 정말 짱이었어요. 울 시아버지 그 전에도 날 예뻐해주셨지만, 그 날 이후로 더 예뻐하셨어요. 내가 시집 처음가서 시아버지에게 찍힌 일이 있었는데 그날 완전히 만회했습니다.
처음에 시댁에 들어가 살던 어느 아침 시아버지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양복을 주시면서 다려달라고 하셨습니다. 전 그때까지 다림질이라곤 한번도 안해봤거든요, 다림질이 별건가 하면서 일단 전기 꽂고 옷을 다렸습니다. 바지를 다 다렸는데, 줄이 두 줄도 아니고 세 줄이 나 버렸어요. 그것 보시던 시아버지 다리미를 뺐더니 직접 다리셨습니다.
그 이후로 한번도 내 손에 다리미 쥐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다림질은 남편 몫이었습니다. 남자들은 군대가면 다림질 배우니까 다림질은 남편들이 하는게 옳지 않은가? 여자들은 요리에 설거지에 빨래까지 하는데, 남편들은 별로 하는 일도 없지 않은가? 전 그렇게 생각해요.
하여간 내 옷은 다려서 입을만한거 별로 안사니까 전 다리미 없이 살아도 별 불편함이 없습니다. 다만 한복 입는날은 좀 그러니까 남편에게 맛있는 것 해주며 다림질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거 거절할 남편들이 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ㅋㅋㅋ
다시 돌아가서 어짜피 중고가구에 중고 벽지에 중고 장판으로 시작한 신혼인거 험하게 써보자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험하게 썼습니다.
첫딸아이 8개월되자 나는 아이 손에 연필 쥐어주기 시작했습니다. 끝내주는 조기교육이었어요. 그런데 정말 영리한 내 딸아이 8개월에 연필잡고 그림을 그리더군요( 이건 완전히 팔불출이나 하는 소리...그냥 선긋는 정도였음)
손에 안묻는 크레파스 사서 쥐어주고 보행기 타고 다니며 벽에 낙서하게 했습니다. 이사할때까지 제 아이 키높이에는 온갖 추상화가 다 그려졌습니다. 벽지 뿐만 아니라 씽크대, 책상, 장식장, 장롱, 기타등등 아이 손 닿는 모든 곳엔 낙서가 있었습니다.
난 내 아이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만 네돌이 되지 않아 한글 깨우치고 한글 받아쓰기도 할 정도로 극성을 떨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무 소용없었던 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 누구보다도 잘키워야지 하는 마음이 깔려있었기 때문에...
난 딸아이 낳고 눈물을 줄줄 흘렸던 사람이었습니다. 딸이었기 때문에 울었습니다. 나는 아이 나오는 그 순간까지 아들인줄 알았습니다. 아들을 너무 너무 낳고 싶었는데, 낳고 나니 의사가 "딸입니다 " 라고 하는데 그 순간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내가 맏이로 태어나 너무 고생하며 커서 동생들 때문에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너무 힘들어서 내게 오빠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철들면서 그 생각을 늘 하면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나는 첫 아이는 무조건 사내를 낳아야지. 그래서 내 딸에겐 절대로 나처럼 무거운 짐 안지워줘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하나님은 제게 첫딸을 주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셨겠지만, 저는 눈물이 주룩 주룩 흘렀습니다.
서러웠습니다. 딸이란 소릴 듣는 그 순간부터 내 머리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태반이 나오고 꼬매고 하는 몇분간, 내 머리속의 생각들 땜에 태반이 나왔는지, 의사가 꼬맸는지 아직도 기억에 없습니다.
"내 아이, 나처럼 이렇게 배아파 아이 낳을건데, 내 아이에겐 이런 고통 안주고 싶은데, 살아가면서 동생땜에 맘고생 하게 안하고 싶은데, 뭐 그런 생각들..."
하도 우니까 의사가 묻더라구요 "아줌마 마취 풀려서 아파서 우세요? 마취 한번 더 해줄까요?" 농담으로 하는 소리였겠지만, 그 소리도 제 눈물을 그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둘째를 낳지 않았습니다. 딸 아이 하나 잘 키워서, 정말 공주처럼 키워서, 훌륭한 사람 만들어야지 그런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8개월부터 연필을 쥐어주고, 두 돌 지나자 학습지 시작하면서 함께 있을때는 언제나 읽어주고 줄긋기 시키고,
장난감은 레고 한통 사줬더니 별로 안가지고 놀길래, 그 뒤로는 선물 들어오는 인형 몇개를 제외하곤 장난감이라곤 사준 기억이 없습니다. 책만 무진장 사줬습니다.
책이 장난감이고 공부는 놀이였습니다. 백화점에 가도 딸아이는 장난감 코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음에 드는 책 하나 고르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그럼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음... 공부는 놀이야. 노는 것 처럼 공부하면 입시 스트레스 안받을꺼야 계속 그렇게 커주렴..."
다행히 다른 아이들보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는 덜 받는 것 같습니다. 그 애에게 공부는 놀이였으니까요
이야기가 이상하게 흐르네요, 첨부터 시간적인 흐름따라 쓰려고 하는데도 자꾸 다른 곳으로... 정말 갈수록 횡설수설이 되고 있네요. 내일은 또 다시 시간적인 흐름을 찾아 쓰겠습니다.
복된 주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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