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이제 십 삼년, 다섯번 이사를 했네요. 물론 내 아이 공부때문에 이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지막, 지금 사는 이곳은 순전히 내 아이들을 위해서 이사를 했답니다.
이 땅의 모든 신혼부부들이 저처럼 15평 주공아파트 전세로 출발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이 키우기에 어쩌면 그런 아파트가 최고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구요 새댁들도 많고, 내 아이 또래도 많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파트 평수가 조금씩 조금씩 늘기 시작해서 어떻게 하다보니 큰애가 유치원 들어가기 전에 49평 아파트에 살게되었어요 처음엔 그 집의 넓음에 놀랐지만, 너무 너무 좋더라구요 비록 내 집은 아니었지만...(3000만원 전세살았어요. 그 넓은 집을...내겐 애인같았던 우리 시아버지 덕분에)
어쩌면 상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혼과 동시에 한 집에서 모시다, 남편의 교통사고로 부랴부랴 분가시켜 주시던 시아버지, 그러나 한주도 빠짐없이 주말은 시댁에서 늘 지냈죠. 편찮으신 시어머니 때문에, 그리고 시아버지의 손녀사랑이 너무 지극하셔서... 금요일이 되면 늘 전화오시죠 "야야, 언제 올라오노?"
철없는 며느리에게 때로는 그 말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죠. 그렇게 오년을 살았더니, 미국간 형의 재산증식용 집을 강제로 우리에게 삼천에 전세살게 해 주시더군요 하루는 시아버지 방에서 잠들어 있던 제게 고함소리가 들렸어요 미국에 전화하셔서 그 집은 절대 다른사람에게 전세줄 수없다고, 막내에게 무조건 줘야 한다고 호통치시던 분 그렇게 해서 우리는 22평 전세금빼서 형에게 주고 그대로 49평으로 이사들어갈 수 있었어요
분양받은 아파트라 새집이었어요. 난방비는 다행히 지역난방이라 온수와 난방 펑펑 돌려도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았는데, 관리비는 솔직히 좀 부담스러웠죠 남들은 내부 인테리어 잘 해 두고 살았지만, 저희는 기본적으로 해 준것에, 맞지도 않는 가구 들여두고 그냥 살았었어요
결혼할때 형에게 거의 강제로 사다시피한 중고농이 안방에 들어가니 겨우 반 조금 더 채우더군요. 그래도 새로 장롱 장만할 형편이 안되어 그냥 살았습니다. 청소 지독히 못하던 제가 매일 매일 다 할수 없어 하루는 반, 나머지 반은 다음날 그런식으로 지냈어요
무엇보다 힘든건, 그 아파트의 내 딸아이 또래들이었어요 유치원다닐때부터 뭘 그리 많이 시키는지, 저도 한때는 헉헉 거리며 따라하기도 했었어요 과외해서 버니까 그 돈으로 하나밖에 없는 딸 가르쳐야지 하는 허영심에, 또 그런 넓은 곳 살다보니까 분위기가 그렇게 되더라구요
친구들이 몇명 모여 선생님 하나 모시고 가르치는 것, 어떻게 보면 그룹과외형태겠죠? 은물도 그렇게 지도하고, 미술도 그렇게, 성악도 그렇게... 피아노 렛슨 선생님 붙이는 것 당연하고, 영어유치원.. 기타등등 그 당시 우리 남편 월급이 백만원 조금 넘었는데, 딸아이 교육비로 60만원이 지출되었어요.
과외 하지 않았더라면 적자였겠죠? 학교 들어가니 22평형대 부터 49평까지 사는 아이들이 한반에 있다보니 아무래도 평수따라 쓰는 돈도 달라지더군요 돈 씀씀이는 부자였지만, 우리 재산은 그들과는 비교도 못할만큼 적었는데...
도저히 그렇게 넓은 평수에 못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청소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도 거기 한몫 거들었어요 내가 집의 노예가 되는 것 같아. 내 분수에 맞게 집을 줄여야겠어.
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지만, 전세금은 계속 오르고 있었고 넓은 집에서 품위 유지하며 사느라, 또 새로운 사업 시작하느라 모은 돈도 없었고 그 돈 빼서 나갈만한 전세도 없었고,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흐르기만 했죠.
그러나 넓은 평수가 아이에게 자신감은 주었나봅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봐주셨겟죠?
갑자기 심장마비로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형이 제안을 하더군요 시부모님 역시 49평에 살고 계셨던터라 저희더러 시어머니 혼자 계신 집으로 들어가 살라구요 그러면 그 집 명의를 저희 이름으로 바꿔주겠다구요. 저희 시아버지 유언이 저희에게 32평 아파트 하나 사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셨거든요. 못해도 32평 아파트 하나는 생기잖아요. 아마 그래서 배짱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그 제안을 제가 거절했어요.
시아버지의 추억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지도 않았고, 늘 내 가슴에 못박는 말 내뱉기를 서슴치 않으시던 시어머니와 한집에서 살고 싶지도 않았기에 고부간의 갈등을 늘 해결해주시던 시아버지 없이 어떻게 시어머니와 함께 지낼 수 있을까? 그 걱정이 전부였어요.
49평 집에 내 앞에서 둥둥 날아가버려도, 그것만큼은 못하겠더라구요 "제가 지금까지 모셨으니까 이제 시어머니는 미국 모시고 가세요. 전 싫어요. 자신없어요" 그렇게 말했죠 그러나 결국 미국으로 모시고 가지 않더라구요
그때부터 아침 점심 저녁 꼬박꼬박 해서 나르는 생활로 접어들었어요 몸이 좀 건강하실때는 시장만 봐 드리면 되고, 또 안좋으시면 매 끼마다 밥해서 가져다 드리고... 함께 살며 따뜻한 밥 해드리는 것만큼은 안되겠지만, 오히려 몸은 더 고달프죠. 둘째 업고 다니며, 저녁늦게까지 과외하며
또 일년후 친정아버지마저 간암으로 돌아가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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