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지독히도 가난하여, 자습서도 헌책방에서 하나 구하면 다행이고,
문제집이라고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고3이 되었다.
고3이 되니 학교에서 사라는 문제집도 좀 있어서 그나마 문제집이 뭔지도 알게되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공부하던 시절,
그래도 울 엄마는 내게 한번도 설거지를 시키지 않으셨다.
설거지 할 시간에 공부하라고...
죽어라고 교과서만 보면 공부 끝인줄 알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마신 물컵 정도는 씻어두라고 시키셨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게으른 자 되지 않았을텐데 싶기도 하다.
저녁에 우유 한잔 마신 컵을 씻으며
내게 물컵 씻기를 가르쳐준 인애가 생각이 났다.
십년쯤 되었나보다.
내가 과외하던 학생이었는데..
그때는 과외가 너무 잘 되어서
우리집 현관에 신발을 벗어둘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한때 이름을 날리던 때가 있었다.
소문에 소문을 물고
경주 시내를 휩쓸다 시피해서
때론 같은 타임에 열다섯명도 가르쳤다.
학년도 학교도 각각인 학생들
방 두개와 거실에 커다란 상 펴두고
이방 저방 날아다니며 가르쳐도
성적은 쑥쑥 잘도 올라갔고
그 덕에 비좁아 터진 집에 서로 들어오겠다고 줄서던 시절
"선생님 물 주세요" 그러면
"응 냉장고에 있으니 알아서 꺼내 마셔" 그러곤 열심히 한 학생씩 붙들고
수학도 풀고, 영어도 설명하고...
한바탕 아이들이 지나가고 나면
온 집안에 있는 컵이란 컵은 죄다 씽크대에 누워있고
물마실 컵이 없을 즈음엔
꼭 한 두 녀석이 씻어두곤 했다.
그때 인애는 늘 강조했었다.
"울 엄마는 물 마신 컵은 꼭 씻어두라고 하셔서
우리 집엔 물컵이 이렇게 씽크대에 쌓여있지 않아요
선생님도 물 마시면 손 잠깐만 가면 되니까
꼭 씻어서 엎어두세요" 라고...
늘 한귀로 흘리던 그 말이
오늘 문득 생각이 난다.
그 귀여운 녀석과 함께 말이다.
늘 그렇게 성실하던 아이
한번도 복습을 미루지 않고 공부하던 아이
제가 마신 물컵 씻어둘줄 아는 그 부지런함이
공부에도 그래도 남아있었는지
시험때 남들처럼 그렇게 허둥거리며 벼락치기 하지 않아도
늘 여유있게 준비하던 아이
지금쯤은 아마 결혼했겠지?
요즘도 물마신 컵을 씽크대로 가지고 갈때면
그 아이의 목소리가 내 귀를 맴돈다.
"선생님 물 마신 컵은 씻어서 엎어놓으세요. 그냥 씽크대에 던져두지 마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