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

40대 중년부부 탐구생활

생각제곱 2010. 8. 13. 19:04

1 마트에서 장볼 때

남편 여자들은 마트에만 오면 지름신이 내리나 봐요. 아직 뜯지도 않은 각종 군것질거리와 음식들이 냉장고에 한가득인데, 그걸 또 집고 있어요. ‘1+1’만 보면 횡재라도 한 듯 손을 뻗고, 반짝행사라도 하면 빛의 속도로 뛰어가 물건을 집어요. 카트 하나로는 모자랄 지경이에요. 시식코너도 절대 지나치는 법이 없어요. 밥 먹은 지 30분도 안 됐어요. 맛만 보고 사지는 않아요. 이 만두는 밀가루 맛이 많이 난다, 이 도토리묵은 도토리 100%가 아니다, 이 불고기는 양념 맛이 별로다 등등 불평불만도 오백 가지가 넘어요. 나이와 함께 느는 건 주름과 위와 뻔뻔함이에요. 계산대에 가요. 20만원이 나왔어요. 아내는 요즘 물가가 이렇다며, 그러니까 돈 더 벌어오라며 오히려 큰소리예요. 헐~!!

아내 즐거운 주말이에요. 오늘만큼은 남편과 함께 맘껏 장을 볼 수 있어 아침부터 스마일이에요. 이것도 눈에 들어와요. 저것도 눈에 들어와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절대 지나칠 수 없어요. 여우같은 아줌마들이 좋은 물건의 1%를 저렴한 값에 채갈 것 같아 늘 예의 주시하고 다녀야 해요. 시식코너를 지나치는 건 마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이쑤시개에 두 개씩은 꽂아 먹어야 이득을 본 거 같아요. 아줌마가 눈치를 줘요. 남편을 불러요. 남편은 체면 때문인지 안 먹어요. 남편 핑계 대며 안 사요. 한 바퀴 더 돌아요. 다른 음식도 시식을 해요. 맛 없어요. 안 사요. 남편이 뭐라고 해요. 안 들어요. 계산대에 가요. 남편이 지갑을 꺼내요. 남편이 제일 멋있어 보이는 순간이에요.

2 오랜만에 섹스할 때

남편 평소엔 세수도 안 하는 아내한테서 웬일인지 좋은 냄새가 나요. 무서워요. 간만에 목욕한 모양이에요. 무서워요. 오늘밤 거사를 치르기 위해 단단히 준비한 거 같아요. 야릇한 눈길을 보내요. 무서워요. 거절하면 당분간 아침밥은 포기해야 해요. 심청이 인당수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할 수 없이 해요. 마음은 변강쇠인데 몸이 안 따라줘요. 아내 반응도 시큰둥해요. 괜히 해줬어요. 아내는 씻지도 않고 자요. 제발 씻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역시 우린 의리로 사는 부부예요. 

아내 머리를 4일 동안 안 감았더니 머리가 떡 방앗간이 됐어요. 인내심 테스트는 여기서 디 엔드(the end)예요. 내친김에 욕조에 물을 받아 새로 산 입욕제를 넣고 목욕까지 해요. 줄리아 로버츠가 된 기분이에요. 산뜻한 기분에 잠이 금방 올 것 같아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더니 남편이 갑자기 들이대요. 섹스를 하고 나면 또 씻어야 되는데, 정말 귀찮아요. 애들 방에서 그냥 잘걸, 후회해도 늦었어요. 남편이 이미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어요. 마음의 준비를 해요. 끝났대요. 왜 건드렸나 싶어요. 안 한 것만 못해요. 내일부터 남편에게 비아그라를 갈아 먹여야겠어요.

3 함께 TV 볼 때

남편  요즘 같은 우울한 세상에 뉴스는 사양이에요. 토론 프로그램도 싫어요. 골치 아파요.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인기 가요랑 스포츠가 짱이에요. 요즘 걸 그룹들은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인형 같은지 보는 것만으로도 엔도르핀이 솟아요. 주먹만 한 얼굴에 쭉쭉빵빵 몸매. 아내에게선 절대 찾을 수 없는 라인이에요. 특히 애프터스쿨의 유이, ‘올레(olleh)’예요. 여신이 따로 없어요. 앞으로 유이가 광고하는 ‘처음처럼 쿨’만 마셔야겠어요. 스포츠는 야구가 최고예요.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쭉쭉빵빵 치어리더를 덤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아내는 드라마에 푹 빠져 살아요. 지난주에 본방송을 보고도 재방송을 또 본다며 리모컨을 사수해요. 뻔한 내용을 왜 보는지 이해할 길이 없어요. ‘각본 없는 드라마’인 스포츠의 재미를 못 느끼는 아내가 불쌍해요. 아내와의 채널 싸움에서 밀려 휴대폰 DMB로 경기를 봐요. 화면이 너무 작아 박진감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요. 차에 가요. 내비게이션 DMB로 경기를 봐요. 휴대폰보다 큰 화면에 흡족해요. 중요한 장면에서 화면이 멈출 땐 분노가 치솟아요. 9회말 2:2 만루 상황. 두산 김현수가 초구를 때렸어요. 하필 이때 화면이 멈춰 끝내기 안타인지 아웃인지 알 수가 없어요. 이게 다 저놈의 여편네 탓이에요. 차 안에서 울고 웃는 자신을 보니 갑자기 처량해져요. 하지만 아내는 포기해도 스포츠는 포기할 수 없어요.

아내 TV 볼 때마다 점점 아줌마가 되어가는 남편을 발견해요. 요즘 아줌마들이 아이돌, 짐승돌에 빠지는 건 우스워요. 걸 그룹 이름도 줄줄이 꿰고 있어요. 진짜 피로회복제는 약국에 있는 게 아니라, 걸 그룹이래요. 짐승돌이 아니라 짐승이 따로 없어요. 스포츠 볼 때는 더 가관이에요. 본방 사수라며 새벽에 박지성이 하는 경기 시간에 맞춰 일어나질 않나, 야구 하기 몇 시간 전부터 TV 앞을 떠날 줄 몰라요. 지난 경기 하이라이트부터 선수 프로필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 남편을 보며, 회사 일을 저렇게 했으면 승진하고도 남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어금니를 꽉 깨물어요. “스트라~~~이크!” 시끄러워 죽겠어요. 야구방망이 한번 잡아본 적 없는 양반이 야구 전문가인 양, 선수들의 활약을 일일이 체크하기 시작해요.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인다는 둥,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는 둥, “도루 도루!! 좀더 빨리!! 슬라이드! 세입~!!”을 외치는 걸 보면 허구연 야구해설위원이 따로 없어요. 조용히 보든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주시길.

4 뱃살 관리 들어간 남편을 볼 때

남편  운동을 시작했어요. 40대 중반이 되고 보니 믿을 건 내 몸뚱이뿐이에요.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셋째도 건강이에요. 내 몸 내가 챙겨야지, 어차피 아내는 아이밖에 몰라요. 나는 레이더망에서 멀어진 지 오래예요. 중학생 아들 녀석 보약은 철마다 챙기면서 나는 그 흔한 홍삼 음료도 안 사줘요. 그냥 물 마시래요. 신경 써준답시고 하는 말이 하루에 물 8잔 마시고 씹어서 먹으래요. 고마워서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겠어요. 

아내 잠을 설쳤어요. 남편이 아침 일찍 운동 나간다고 옆에서 부스럭대서 깬 거예요.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 뚜껑을 여는지 뇌를 열어봐야 알 것 같아요. 매일 운동한다는데 2PM 같은 식스팩은 고사하고 원팩도 생기지 않아요. 운동하고 나서 허구헌날 새벽까지 삼겹살에 소주 두세 병씩 마시니 백날 해도 안 될 게 뻔해요. 혹시 헬스클럽에 찍어둔 여자가 있는 건 아닌지 몰라요. 그럼 차라리 다행이에요. 여자가 눈길도 안 줄 테니까요. 남편 몸은 내가 알아요. 가는 팔다리에 남산만 한 배. 거미가 따로 없어요. 엄하게 운동할 생각 말고 술이나 끊었으면 좋겠어요.

5 레깅스 입고 외출하는 아내를 볼 때

남편  아내가 미쳤나 봐요. 치마를 입었으면 스타킹을 신어야지 저 내복 같은 쫄바지는 대체 무슨 패션인지 알 수가 없어요. 볼록 튀어나온 근육형 다리에선 금방이라도 알이 튀어나올 것 같아요. 울퉁불퉁한 소시지가 따로 없어요. 젊은 애들이 입는 건 그렇다 치고, 아줌마들까지 저런 유해한 옷차림에 동참하는 건 참을 수 없어요. 소리 없는 폭력이 저런 건가 싶어요. 제발 참아주세요.

아내 레깅스야말로 정말 간지 나는 옷차림이에요. 레깅스 유행으로 뚱뚱녀들도 부담 없이 미니스커트를 입을 수 있게 되었어요. 은혜로운 레깅스예요. 색색깔 레깅스에 미니스커트나 길이가 긴 티셔츠를 입고, 오드리 헵번 플랫 슈즈까지. 완벽한 코디예요. 남편 앞에서 한 바퀴 돌아주는 팬 서비스를 발휘해요. 남편, 말을 잊었어요. 원래 무뚝뚝한 사람이니 표현을 안 하는 거라 생각해요. 이번 주 반상회에 입고 나갈 생각을 하니 흐뭇해요. 물귀신 같은 아줌마들이 달려들어서 어디서 샀냐고 물어볼 게 뻔해요. 대량구매해서 20% 얹어 팔아야겠어요.

6 엄친아를 볼 때

남편  아이 하나 잘 키우면 열 직장 안 부러워요. 앉아서 돈을 긁어모으니까요. TV만 틀면 나오는 김연아 CF가 도대체 몇 개인지 세다가 지쳤어요. 길에 다니면서도 광고 속 김연아와 수십 번 마주쳐요. 김연아의 권총이 심장에 명중한 것만 같아요. 김연아 부모는 얼마나 좋을까 부러움에 일이 손에 안 잡혀요. 돈방석 위에 굴러다닐 것만 같아요. 부러워요. 게다가 생긴 건 또 얼마나 예쁜지, 저런 딸 하나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나중에 어떤 놈이 데려갈지 궁금해요. 누구도 성에 안 찰 것만 같아요. 남자들은 나 빼고 모두 짐승이니까요. 아내와 눈이 마주쳐요. 힐끔힐끔 보더니 갑자기 어깨를 주물러 주겠대요. 김연아에게 꽂힌 게 분명해요. 아니 피겨에 꽂힌 게 틀림없어요. 돈 많이 벌어오라는 거예요. 등골 휘어요.

아내 김연아 선수 엄마는 정말 대단해요. 역시 이것저것 시켜봐서 빨리 아이의 재능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해요. 우리 딸도 추운 것도 잘 견디고, 운동신경도 좋고, 인라인 스케이트도 좋아하니 피겨 한번 시켜봐야겠어요. 남편은 자기 자식한텐 정작 관심이 없고 남의 자식 잘난 것만 보고 부러워하고 있어요. 우리 애는 그저 우리 애일 뿐이라며 비교하고 강요하지 말래요. 저렇게 방치하고 나중에 자식 잘되면 자기 덕인 줄 알아요. 내 노력과 관심과 정보력이 없었다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데 말이죠. 김연아는 일곱 살 때 피겨를 시작했다는데, 우리 딸은 여섯 살이니 어쨌든 승산은 있어요. ‘피겨여왕’ 김연아를 넘어 ‘피겨신’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마구 들어요. 내일 당장 시작이에요.

7 부부동반 모임에 나갔을 때

남편  학창시절에는 별 볼일 없던 놈이 결혼 잘해서 처가 덕 보고 사는 걸 보면 속이 꼬여요. 남자 팔자야말로 뒤웅박 팔자예요. 처갓집 부동산이 꽤 많다는데, 우리 장인은 그동안 맛동산만 사 드셨나 봐요. 친구놈은 직장에서 잘려도 걱정 없어 좋겠어요. 앞으로 사업할 거라고 큰소리치고 다녀요. 맘 같아선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에요. 고스톱으로 저놈 푼돈이라도 긁어가야 속이 풀릴 것만 같아요. 이런 삐리리~. 피박 썼어요. 광박은 옵션이에요. 되는 일도 없어요. 아내들이 합세했어요. 잃은 돈을 아내가 따주길 바랄 뿐이에요.

아내 여자의 스타일은 남편 능력과 비례해요. 남편 기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장이에요. 사전 조사를 하지 않는 건 모임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멤버들의 직급, 나이, 사는 동네, 소유 차량, 아이 성적 등을 샅샅이 물어봐요. 서열을 따져보니 내가 중간도 못 되는 것 같아요. 잘나가는 사모님들의 패션에 자꾸 눈이 가요. 최선을 다했는데 남편 친구 부인들을 보니 내 자신이 초라해 보여요. 큰 알 박힌 저 진주반지는 값이 꽤 나가 보여요. 피부와 몸매도 정말 탱탱하고, 얼굴에 보톡스도 맞은 것 같아요. 돈이 좋긴 좋아요. 역시 여자는 남편을 잘 만나야 팔자 펴요.

8 동네 아줌마들이 쳐다볼 때

남편  이놈의 인기는 나이가 들어도 식을 줄을 몰라요.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 아내한테 잘하는 공처가로 소문난 모양이에요. 하긴 나처럼 가정적이고 자상한 남편은 드물어요. 그래도 그렇지, 요즘 아줌마들은 아무한테나 들이대요. 나는 걸 그룹 외모 아니면 상대 안 하는데 그것까진 아직 간파하지 못한 눈치예요. 대놓고 빤히 쳐다보니 부끄부끄예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옷에 더 신경 쓸걸 그랬어요.

아내 저 여편네들이 내 남편을 보며 무슨 상상을 할지 다 알아요. 술김에 나도 모르게 한 이야기인데 머리 나쁜 여자들이 기억력은 소머즈예요. 한 명한테 말했는데 다음날 온 동네 아줌마들이 다 알아요. 역시 비밀은 없나 봐요. 저 여편네들 남편도 별 볼일 없기에 스스로를 위로해요. 그래도 힘센 남편과 살고 싶은 생각은 변함없어요. 옛날 마님들이 왜 마당쇠에게 쌀밥을 먹였는지 백배 이해가 가요. 오늘부터 남편에게 홍삼이라도 먹여볼까 생각해요. 홈쇼핑 주문 벌써 들어갔어요. 홍삼 먹고 제발 3분만 넘겼으면 좋겠어요.

9 문상 다녀온다며 외박할 때 

남편  친구 녀석들과 오랜만에 한잔했어요. 필 충만해요. 이 기분대로라면 4차까진 가줘야 할 것 같아요. 정신줄을 놓기 전에 아내에게 전화해요. 결혼 후 남자들이 외박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문상이에요. 서울 근교는 안 돼요. 무조건 전라도 밑이에요. 그래야 당일 올라올 수 없어요. 아내가 가장 사랑스러울 땐 외박을 허락해줄 때예요. 룸살롱에서 만난 그녀와 어떻게 해볼 생각은 없어요. 그저 순간을 즐기고 싶을 뿐이에요. 

아내 남편이 또 거짓말을 해요. 같은 친구 부모님 돌아가셨다는 말을 한 것만 벌써 세 번째예요. 한 번은 노환으로 죽 고, 한 번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대요. 엄한 사람 죽이는 게 취미인가봐요. 술 먹고 광란의 밤을 보내거나 여자가 생긴 것이 분명해요. 빼도 박도 못 하는 증거를 들이밀어야 저 양반이 움찔할 것 같아요. 그래서 일단 모르는 척 외박 허락했어요. 요즘엔 스마트폰으로 위치 추적이 가능하다는데 그거 하나 사줘야겠어요.

10 결혼기념일 맞았을 때

남편  벌써 결혼 20주년이에요. 20년 동안 아내에게 결혼기념일 선물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집안일을 시키는 아내지만 이날만큼은 예외예요. 그래도 반찬은 달라져요. 나는 밖에서 근사한 저녁을 사주고 싶은데 아내는 돈이 아깝대요. 애들 키우면서 제대로 된 외식도 못하고 늘 돈 한 푼에 벌벌 떠는 아내예요. 나름의 이벤트를 생각하고 있는데 아내가 선방을 날려요. 꽃 배달은 하지 말래요. 돈으로 달란 얘기예요. 아이들 교육비나 생활비로 나갈 게 뻔해요. 좋은 화장품 하나 사주고 싶은데 뭐가 좋은지 도통 감이 안 와요. 이럴 땐 아내들이 필요한 거 정해줬음 좋겠어요. 아내들이 자꾸 됐다고 하고 뭐만 사오면 돈 아깝다고 잔소리하니까 남편들이 더 안 하는 거예요.

아내 남편이 또 쓸데없는 짓을 해요. 기념일을 챙겨주는 건 좋지만, 무슨 날만 되면 물질적으로 해결하려는 게 마음에 안 들어요. 사랑한다거나 고맙다는 따뜻한 문자 한 통이면 되는데 말이에요. 굳이 선물을 해줄 거면 남는 걸로 해줬으면 좋겠어요. 꽃이나 케이크처럼 시들면 끝이고 먹으면 끝인 선물은 질색이에요. 10만원이면 아이들 한 달 적금이고, 한 달 단과 학원비예요. 차라리 돈으로 주는 게 나아요. 그럼 돈밖에 모른다고 구박해요. 나이 들면서 여자가 드세지는 건 남자들 탓이에요. 

11 명절에 시댁 갈 때

남편  매년 명절만 되면 아내 눈치 보느라 머리카락이 빠질 정도예요. 무슨 놈의 여편네가 시댁을 지옥 가기보다 싫어하는지, 이제 웬만한 방법은 약발도 받지 않아요. 머리를 쓰기 시작해요. 명절 한 달 전부터 장모님을 챙겨요. 용돈을 보내드리는 센스도 잊지 말아야 해요. 아내 귀에 들어가요. 고맙대요. 아내도 어쩔 수 없이 시댁에 끌려가줘요. 이번 약발이 떨어지면 자식들을 공략해야 할 것 같아요. 아들이 할머니 보고 싶다는데 가만히 있는 엄마가 어디 있겠어요.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에요.

아내 남편은 삼형제 중 차남이에요. 그런데 남편만 시댁에 잘해요. 명절 때도 형님은 코빼기도 볼 수 없어요. 회사 일 때문에 도저히 올 수가 없대요. 무슨 놈의 회사가 명절 때도 직원을 붙들고 일을 시키는지.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시부모님은 넘어가줘요. 형님은 좋겠어요. 시부모님께 애교 떨고 용돈 두둑하게 보내드리면 끝이니. 장남은 장남이라 용서되고, 막내는 막내라 용서돼요. 중간에서 이눈치 저눈치보는 남편만 고생이에요. 잘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우린 열 번 잘해도 한 번 못하면 욕 먹어요. 형님은 열 번 못해도 한 번 잘하면 칭찬 들어요. 얄미워요.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남편이 이젠 별 수를 다 써요. 친정엄마를 공략하기 시작했어요. 평소에 잘했으면 얄밉지나 않지, 명절 한 달 전에 아양을 떠니 속 보여요. 그래도 그 모습이 안쓰러워 속는 척해줘요. 남편 스트레스는 더 할테니까요.

12 해외출장 떠날 때

남편  남들은 해외출장을 자주 간다고 하면 부러워해요. 하지만 내 마음은 항상 무거워요. 이번 출장을 잘 마무리해야 승진할 수 있어요. 나는 원래 비행기 타는 걸 제일 싫어해요. 고소공포증도 있어요. 외국어 울렁증은 더 심해요. 해외출장은 진짜 스트레스 만땅이에요. 남편 마음도 모르고 아내는 이 와중에도 돈을 밝혀요. 용돈이나 두둑하게 주고 가라며 염장을 질러요. 아, 진짜 해외에서 돌아오고 싶지 않아요.

아내 와우! 점찍어둔 명품 백을 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예요. 남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브랜드와 품명을 알려주었으니 잊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떠나기 전에 받아쓰기라도 한번 시킬 걸 그랬어요. 이참에 화장품도 새로 싹 사야겠어요. 이번 주말엔 동네 아줌마들과 외곽으로 나가 꽃구경도 하고 고기 좀 굽다 와야겠어요. 다 큰 아이들이 이렇게 고맙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어요. 


출처: 우먼센스